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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로버트 무가베 : 짐바브웨를 어떻게 아프리카 최빈국으로 만들었나?

by 365 ^^ 2023. 10. 5.

로버트 무가베 김일성을 롤모델로 삼다. 

사상 최악의 독재자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는 한때 국가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영웅이었으나 이후 최악의 학살을 자행한 인물로 37년간 장기집권을 했고 그가  롤모델로 삼은 나라가 북한이다. 

 

 

무가베는 총리가 된 이후 그의 정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 김일성을 만나게 된다. 무가베는 공산권 국가 중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단독 군사지원을 요청할 경우 서방의 지원이 끊어질 위기였다. 당시 아프리카에 군사원조를 했던 나라가 북한이었고 북한은 무가베에게도 군사를 제공 제의하면서 김일성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1980년 10월 김일성과 무가베는 수교를 체결했고 북한과 짐바브웨는 우호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구쿠라훈디 학살 사건

이때 무가베는 북한의 1당 독제체재에 매료되었고 자신만을 위한 지배 국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북한의 마스게임, 카드섹션 등을 보고 감명을 받아 똑같이 따라하기도 하고 김일성을 롤모델 삼아 스스로 우상화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작업이 자신의 정치적 정적 조쇼아 은코모를 제거하기로 한다. 

 

 

그래서 은데벨레족을 제거할 구실을 찾았고 독립운동때 사용했던 무기상자를 쿠데타에 사용하는 것라며 북한 교관들이 교육시킨 제 5여단를 투입 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쿠라훈디 학살 사건이다. 

 

1983년부터 시작된 구쿠라훈디 학살은 2만여 명의 피해를 남겼다. 구쿠라훈디는 쇼나어로 '봄비가 오기 전에 겨를 씻어내는 이른 비'를 의미하는데 은데벨레족 남성은 보는 즉시 즉시 구금하고 처형했고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타후 산채로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반무가베 세력은 태어나기도 전에 없애야 한다며 임산부들도 서슴없이 살인했다. 

 

북한이 좋지 않은 폭력을 수출한 셈이다. 지금 짐바브웨 사람들도 북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이때 은코모는 국경을 넘어 런던으로 도피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무가베와 단일화에 서약한다. 이로써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애국전선으로 통합하게 된다. 이후 총리제를 폐지하고 헌번개정을 통해 대통령제로 바꾸며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것이 장기 독재의 시작이었다. 

 

짐바브웨 경제 파탄 원인

무가베 지지세력인 퇴역 군인들이 재정을 축내면서 짐바브웨 경제는 위태로워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 차례 짐바브웨에 기근으로 식량부족 사태가 일어난다. 결국1990년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고 그 조건으로 나라의 경제를 구조조정해야 했다.  국영 기업의 민영화로 대규모 실업 발생, 사회복지 보조금 지급 철폐로 질병확산 및 식량 안보 위기, 무역 및 통화 규제 완화로 인한 산업 경쟁력 악화로 인해 예전보다 경제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무가베는 2차 콩고 내전을 지원했다. 여기서 얻은 무기판매금액으로 무가베 자신과 측근들이 차지하고 전쟁부담 지원금을 국민들에게 떠넘겼다. 이렇게 1990년대 짐바브웨 경제는 급하락세를 보였고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무가베는 이런 퇴역군인을 달래기 위해 백인들의 토지를 몰수해 버렸다. 문제는 백인의 농장이 짐바브웨 농작물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몰수 결과 식량 수출국에서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해버렸다. 또한 농장에서 일하던 40만명의 흑인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가족 포함 약 200만 명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무려 50%에 이르는 실업률이 발생하게 된다. 무차별 백인 토지 몰수 정책이 알려지며 서방의 경제적 지원마저 중단되었다. 2004년까지 약 300만 명의 사람들이 먹고 살길이 없어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자신의 장기집권에만 맞춰진 무가베의 안일하고 즉흥적인 경제정책으로 인해 짐바브웨는 경제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고 상품 가격이 솟구치는 악순환이 되었다. 이로 인해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이로 인해 100원이었던 물건이 2억 3천 백만원이 되었다. 급기야 100조 짐바브웨이 달러 화폐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 돈으로는 커피한잔도 살수 없는 가격이다. 고작 달걀 몇개, 일주일 버스비 정도였던 것이다. 

 

 

커피 원두 1봉지의 가격은 10억 짐바브웨이 달러(미국 10달러 가치)가 되었고  교사 월급 29조였고 거지도 구걸을 하면 10조 짐달러는 벌수 있었다. 

 

 

이에 나라에서 외국달러 사용을 허용하게 된다. 점점 시장에서는 짐바브웨 달러는 자취를 감췄고 결국 무가베는 2015년 짐바브베 달러를 폐지했다. 

 

세계 최악의 독재자 등극

또 다른 문제는 열악한 의료시설 및 기근으로 인한 기아에 사람들은 죽어갔다. 무가베는 짐바브웨를 국가 경제파탄과 국민의 생명까지 앗아간 독재자가 되었고 나락으로 떨어진 평판은 2009냔 3월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무가베는 그의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 정권 유지를 위한 그가 만든 특별기관 합동작전 사령부JOC 는 국가 안보를 조정하는 최고 기관으로 무가베 정권 유지를 위해 선거 조작 및 폭력 행위를 자행한 조직이었다. 여기에는 국군, 경찰, 중앙은행 까지 포함 매주 회의를 무가베가 주관했다. 반대파를 고문, 폭행, 살해까지 자행했기에 그의 정권은 유지가 가능했다. 

 

대통령 선거 시기가 다가오자 무가베에 맞선 모건 창기라이는 수차례 암살시도에 시달렸고 결국 당선을 위해 선거인 명부를 조작하며 선거를  방해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을 무자비하게 탄압 , 결국 결선 투표 참여를 포기하며 2008년 6월 단독 후보로 84세 재집권에 성공한다. 

 

    

1996년 무가베는 비서였던 그레이스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41세였다. 결혼 이후 이들의 초호화 생활은 극에 달했다. 무가베는 자신의 생일때 마다 자신의 나이만큼의 무게의 케익을 만들었고 초호화 생활파티를 했다. 

 

 

파티에 쓴돈이 평균 17억 정도였다. 무가베의 아내 그레이스는 명품 구찌 쇼핑광으로 1시간에 1억원 이상의 쇼핑을 했고 사치뿐 아니라 거친성격과 안하무인의 태도로도 문제가 되었다. 그런 그레이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려 했고 이에 부통령을 전격 경질했고 이에 군부는 쿠테타에 나선다. 군부는 수도를 장악후 궁지에 몰린 무가베는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사임후에도 그는 딱히 잃은 것은 없었다. 군부는 기소 면제와 함께 매달 거액의 연금을 지급했고 나라안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호화로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2019년 95세의 나이까지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역사: 독립국가 되기까지 .. 119 -1

 

아프리카 짐바브웨 역사: 독립국가 되기까지 .. 1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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