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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유 (114 - 1)

by 365 ^^ 2023. 8. 30.

얄타회담 내용

1945년 2월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을 향해 갈 즈음 연합국 소속의 지도자들이 흑해 연안의 알타로 모이게 된다.  총 8일간 얄타에 머물면서 전후 세계 질서를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 논의를 했다. 

 

 

얄타회담의 주요 의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 처리에 관한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을 4국이 분할관리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한반도에 대한 사항도 논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일본에 대한 처리문의도 논의되었고 그에 따라 한반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문제도 논의된 것이다. 

 

 

이때 연합국들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조항이나 방법들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분할 점령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1945년 5월 8일에 나치 독일이 항복했고 1945년 8월 14일 일본도 무조건 항복을 하면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난다. 그와 함께 한반도의 운명도 결정이 되었다. 1945년 8월 38선을 경계로 북에서는 소련이 남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무장해제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38선은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8도를 지나는 선으로 그어졌는데 지형, 행정경계, 교통로를 무시한 그야말로 직선이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 내용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따라 북한에는 소련 민정청이 설립되고 남한에는 미국 군정청이 설립되어 최대 5년간 분할 통치가 결정된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되었다.   

 

 

한반도 남과 북에 정권이 들어서고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어 가던 중 1949년 3월에 북한의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제 막 정권을 수립한 북한은 소련의 원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소련과 원조 조약을 체결해 정치외교 군사안보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약 3천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  그리고 각종 선물을 준비해서 갔다. 책장과 사무용 테이블등 26종의 가구를 선물했다. 

 

북한 고위층이 사용하는 고급가구들

선물 목록에는 스탈린을 위한 꽃병도 있었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요청한 일이 무력으로 남한을 침범해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스탈린은 미국의 존재 때문에 남침을 반대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던 미국이었고 무엇보다 이때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핵을 보유하고 있던 국가였다. 

 

리틀보이, 팻맨 핵 폭탄

이 핵 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고 그 위력을 증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이것으로 미국과 소련이 정면 충돌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소련이 미국을 쉽사리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스탈린이 처한 소련 내부의 문제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극심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소련은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소련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일이었다. 

 

1949년 6.25의 분수령

그런데 1950년 1월 30일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전문을 보내서 모스크바로 불러낸다. 소련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스탈린 마음이 바뀌게 된다. 1949년 한 해에 많은 일이 벌어진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들어왔던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게 된다. 군사 고문단 자격으로 남은 미군은 단 500여 명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이유는 북한은 1947년 이후 소련은 이미 북한에서 철수를 하고 있었는데 소련군이 주둔하지 않아도 친소적인 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남한 역시 1949년 6월 30일까지 철수를 완료했고 국가안보 전략 차원에서 한반도는 그리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1947년 미국에서 작성한 국가 안보 관점에서 본 미국의 대외원조 관련 문서를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당시 아시아보다 유럽, 남아메리카 지역을 중요시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을 가장 중요시했었다. 앞으로의 이념전쟁에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유일하게 적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또한 미군 주둔 비용은 엄청났고 이로 인해 많은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는 한반도에서 철수하기 했던 것이다. 

 

 

1949년 6월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이후 2달 뒤에 세계 군사 경쟁 구도를 뒤흔든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은 핵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되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발발한 제2차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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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미국의 태도에 주목했다. 국공내전 초기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6,47년 두 차례 특사를 파견해 중국 정세를 파악하고 생각보다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미국은 국민당에 대한 추가 지원을 끊어버렸다. 전세를 뒤엎기 위해 미국에서는 지상군 파견을 해야 했으나 당시 미국의 상황으로는 무리였다. 또한 그 필요성이 약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의 남침을 허가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중국을 방관하는 미국 태도에 한국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애치슨 라인

그러나 미국의 안보 전략에는 또 한번의 중요한 변화가 찾아온다. 중국 공산화 며칠 후 1950년 1월 12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북태평양 알래스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정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애치슨 라인에는 한국과 타이완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폭등한 국방비로 인해 안보상 중요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설정했던 것이다.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과 함께 타이완이 빠져있는데 이것의 의미는 미국이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시그널이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에 대한 위협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잇따른 사건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스탈린에게 심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1950년 2월 14일 소련과 중국 사이에 우호 조약이 체결된다. 스탈린은 애치슨 라인 발표 이후 중국의 마오쩌둥이 미국 편에 설까 염려스러워 기존의 장제스와 세웠던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마오쩌둥과 새로운 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공산주의 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관계는 우호적이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던 관계이다. 마오쩌뚱은 소련과 동맹을 가지면서도 최대한 자율성과 독자성을 가진 국가를 만들려고 했고 스탈린은 중국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중국이 독자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공산주의 진영의 지도자는 오직 자신 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다른 국가 지도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그들의 대변까지 조사했다. 

 

소련과 중국이 우호조약을 맺고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김일성은 1950년 3월에 다시 한번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약 한 달간 모스크바를 비공식 방문해 스탈린과 3차례의 회담을 거쳐 남침 계획을 구체화했다. 이 시기 한반도의 여러 여건을 고려해 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판단하고 북한을 지원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요건을 위해 스탈린의 전제조건이 있었다. 미국이 개입하면 소련은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북한의 전쟁 계획에 대한 마오쩌둥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찾아갔고 그는 스탈린의 발언이 사실인지 진위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써서 전쟁 동의를 확인시켜 줬다. 그러나 마오쩌뚱도 조건을 제시한다.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만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국은 여전히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중국이 참전을 결심한 이유는 제2차 국공내전에서 북한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 고위 인사들 가족과 공산당군의 피난처를 제공했던 북한이었다. 이로써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모두에게 남침 계획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김일성이 남침 계획을 세운 이유는? 

김일성이 남침 계획을 세운 이유는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차지하는 것을 본 후 고무되어 있었고 전쟁으로 한반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북한이 남침을 하면 남한에 있는 공산주의 세력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그 규모를 약 20만 명으로 예상했고 그로 인해 3일이면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며 6.26 전쟁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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