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유 (114 - 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빠르게 북한군은 남진했다. 그리고 단 3일만에 서울은 북한에 점령당한다. 북한은 남침당시 전차를 242대나 몰고 왔으나 남한에는 한대의 전차도 없었다.
그리고 북한군은 이런 뛰어난 전차 전력과 함께 중요한 전력이 또 하나 있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조선족 병력이었다. 국공내전이 끝난 후 조선족 출신 병사가 많았던 중국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보냈던 것이다. 이들은 두 차례 전쟁으로 실전 경험도 풍부했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군의 핵심 전력이 되어 남침의 선봉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중국이 6.25 전쟁 전까지 입북시킨 조선족 병력은 약 63,000 명이였고 이것은 북한군 병력의 1/3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남침 소식에 미국의 반응은?
1950년 6월 24일 트루만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인디펜던스에서 주말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이때 밤10시에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화 한통을 받는다. 애치슨은 남침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6.25 전쟁에 군사력으로 대응하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엔에 승인을 받으려는 이유는 가능한 한 빠르게 개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의회의 승인을 거져 전쟁 개입을 결정하면 내부 승인절차에서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의원들까지 고려한 결정이었다.
유엔 안보리의 전쟁 개입이 결정되면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예상이 빗나간 순간이었다. 미국 안보리의 승인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절차는 상임이사국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는데 만장일치가 되어야 결의안이 통과된다.
5개의 나라 중 소련이 있었고 미국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기권을 했다. 그래서 소련을 제외시키고 결의안이 통과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이 기권한 이유는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전쟁에 개입한 것을 숨기려 했던 스탈린이였기에 거부권을 행사 시 배후로 지목될 것을 염려했을 것으로 추측, 반대로 찬성을 한 경우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배신을 의미해서 이 또한 파장이 있을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또한 항의하는 공산 진영에게 변명으로 미국이 한반도에 있는 동안 유럽에 집중할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보리의 결의안으로 북한은 침략국으로 규정이 되며 이로써 유엔군이 조직이 될수 있었다. 그것과 함께 6.25 전쟁은 미국이 전쟁에서 유일하게 유엔을 동원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적극 개입한 이유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적극 개입한 이유는 미국은 북한의 남침에는 소련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미국 내 충격이 컸던 상황이었고 한반도 마져 공산화 된다면 아시아의 주도권을 소련에게 넘겨줘야 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미국은 대한민국 성립에 크게 관여했고 이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동맹국에 신뢰를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내 정치상황때문이다. 미국내 강경파들은 중국 본토가 공산화된 건 트루먼의 잘못이라고 몰아부쳤고 트루먼이 국익을 해치고 있다고 거세게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루먼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수 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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