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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6.25 전쟁 : 미국 소련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전 114 -3

by 365 ^^ 2023. 8. 30.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주일미군을 급파했고 7월 8일 영국, 호주, 튀르키예 등에서 유엔군이 합류하게 된다. 6.25 전쟁 때 유엔 깃발을 꽂고 들어온 국가는 16개 국가고 1953년까지 34만 1천여 명의 유엔군을 파견했다. 

 

 

미국이 전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후 전쟁 초반 북한군에 밀리던 전세는 9월이 되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6.25 전쟁의 판도가 바뀌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미군과 국군은 서울로 진격, 약 3개월 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미국이 개입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 망명을 권유했다. 수세에 몰린 북한은 마오쩌둥에게 긴급 편지를 보낸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면서도 소련은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참전 여부를 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엔군의 북진 

그러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1950년 10월 19일 평양까지 점령한 것이다.  이것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맥아더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유엔군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자 중국은 바로 마음을 바꿔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이에 중국은 총 37개의 군대와 113개 사단 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하고 이후 1950년 10월 19일 1차로 약 20만 명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며 6.25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중국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최대 13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50년 12월에는 북한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게 된다. 미국이 북한을 점령하면 한국과 타이완 양쪽에서 포위된다는 중국의 두려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공군 파견

6.25 전쟁에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자 스탈린도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11월부터 소련의 공군을 파견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미국과 소련 간의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이 공중전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세계 최초로 제트 전투기 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정전 때까지 14개 전투비행단이 2만 6천여 명 병력을 주둔했고 총 63,229회 출격을 했다. 

 

F-86 세이버/ MIG-15

 

소련 참전을 숨기기 위해 무엇을 했나? 

그러나 그때까지도 소련은 참전을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에 교신 시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라고 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무력 충돌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였다. 심지어 소련공군에게 소련 군복을 입지 못하게 했고 전쟁 내내 소속도 밝힐 수 없었다. 

 

 

소련 공군이 북한에 비상 착륙할때는 미군으로 오해받기도 해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소련 공군 대원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배지를 달고 다니기도 했다.  

 

6.25 참전한 유명인들 

미국의 공군 중에는 인류 최초로 달에 간 닐 암스트롱도 6.25 전쟁에 참전에 비행 임무를 78번이나 수행했다고 한다. 그 활약으로 여러 훈장을 받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 테드 윌리엄스도 참전했는데 평양에서 전투기가 파손되는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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