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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마리앙투아네트 이야기 (결혼- 가짜뉴스- 처형)

by 365 ^^ 202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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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탁월한 정치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자 황제였다.

 

마리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정략결혼의 이유 

1756년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7년 전쟁(1756~1763) 이 벌어진다. 당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유럽의 대부분 나라가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었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약 300년 이상을 완전한 적대 관계로 지내다가 프로이센의 세력 확장과 함께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후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적대 관계였던 프랑스와 동맹을 결성한다. 이는 프로이센-영국세력에 맞서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당시 동맹을 맺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정략결혼이었다.

 

 

1770년 5월 어느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부르봉 왕가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이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14세 루이 16세 (15세)였다. 원래 루이 16세의 약혼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였다. 아픈 언니를 대신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로 시집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약 50대가 넘는 마차에 시종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떠난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완전한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국경지역에서 이름을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 앙투아네트로 프랑스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옷도 프랑스식 옷으로 바꿔 입고 데리고 온 하인들도 모두 돌려보낸다. 그 후에 결혼을 이틀 앞두고 숲에서 루이 16세와 첫 만남을 가지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마리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나이는 14세, 15세였다. 

 

결혼식에 초대된 인원만 5000명이었다. 결혼식 당일 엄청난 천둥과 벼락이 쳤다고 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화려한 불꽃 놀이가 시작되며 결혼식 축하행사가 열린다.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약 132명이 압사사고로 사망한다. 이에 자신들의 궁정 비용을 희생자 가족들에게 위로금으로 전달했으나 베르사유 궁에서는 여전히 축하 파티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 장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민 밉상이 되었던 이유 

마리 앙투아네트는 7년 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루이 16세는 평소 사냥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불임에 대한 책임을 적국에서 온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물었다. 

 

마리앙투아네트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자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루이 16세의 남동생 부부 아르투아 백장이 아들을 먼저 출산한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동성애를 한다, 남동생 백작들과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졌다. 온갖 구설수로 민심을 잃기 시작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7년 만에 천만다행으로 임신을 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한 노력 `

마리앙투아네트는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1782년 12월 최초로 열기구를 띄운 몽골피에 형제를 후원했고 직접 참관까지 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또한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어릴 때 모차르트를 만났던 일화도 있고 그 후에 모차르트를 음악 선생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차르트와 로렌초 다 폰테가 만든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란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남녀 관계 이야기를 다루지만 내부적으로는 신분 제도의 도전과 조롱을 담은 작품이었고 루이 16세는 이 작품의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끈질긴 설득으로 공연이 성사되었다.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그려지 초상화인데 초상화 공개 후 더 큰 비난을 받게 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마리앙투아네트가 입은 슈미즈는 속옷과 같은 것인데 면화로 만든 옷인데 면화의 수입국은 인도였고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이에 적국 영국의 옷을 입었다고 비난했다. 

 

 

이에 또 다른 초상화를 그렸다. 이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가정적인 분위기의 초상화인데 이런 노력에도 이미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가정적인 분위기의 초상화 

백성들이 빈곤했던 이유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은 매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티를 즐기는 귀족들과 달리 먹을 게 없어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바로 이때 최악의 자연재해로 사람들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난으로 혹독한 세금 징수까지 신분제와 가혹한 세금 불평등한 상황이 끝나길 바랐던 시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그림이다.

 

그림 속 제목은 "이러한 농간이 곧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굶어 죽어가는 국민들이 있는데 (1775~1783)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약 8년간 벌인 전쟁인데 프랑스는 적국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독립 전쟁에 지원한 것이다. 

 

1789년 프랑스 왕국 총수입이 4억 7500만 리브르였는데 루이 16세가 독립 전쟁을 지원하는데 약 20억 리브르를 사용했으니 매년 왕국 총수입 대부분을 독립전쟁 지원에 올인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독립에 성공했는데 미국이 독립 후에 교역했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빚만 늘어났다. 

 

 

프랑스혁명의 시작

혹독한 세금과 빈곤으로 귀족들에게 분노를 느낀 파리 시민들을 루이 16세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해산시켰다. 결국 시민들은 폭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간다.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 동쪽에 있던 요새였는데 루이 13세 이후 계몽사상가나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다른 이유는 이곳에 화약과 무기가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노골적 가짜 뉴스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가짜 뉴스가 훨씬 악랄하고 외설적이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 팜플렛에서 마리앙투아네트는 나쁜 딸, 나쁜 아내, 나쁜 어머니, 나쁜 왕비 모든 것에서 있어서 괴물로 묘사된 것이다.
당시 팜플렛에는 마리앙투아네트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여성, 모든 사람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소문이 났다.사회적 신분은 옷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옷을 벗겨 알몸으로 표현한것은 원초적 인간은 평등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 와중에 프랑스의 물가는 계속 치솟아 빵 한 개의 가격이 하루 일당 정도였다. 이에 여성들도 시위에 나섰다. "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외치면서 1789년 10월 5일 수천 명의 여성들은 20KM가 넘는 행진을 시작으로 시청광장에 모여서 베르사유궁까지 쳐들어간다. 

 

파리 연행당시 풍자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까지 들어가 그들을 잡아서 파리로 향하게 된다. 베르사유궁에서 쫓겨난 튈르리 궁으로 압송된다.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는 국민들의 감시하에 갇혀지내다 . 

 

마리 앙투아네트 제안으로 위협을 느끼는 파리를 루이16세와 탈출한다. 이들은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325km 떨어진 몽 메디로 가려고 했고 그 사이에 왕이 도주했다는 소문에 파리 전역에 퍼지게 된다. 왕가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 나라를 버리고 도주한 국왕에게 격노하고 시민들은 실망한다.  그러던 중 어느 마을에 지폐의 초상화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한 시민에게 발각되어 다시 파리로 압송되어 왔다. 

 

 

 

 

루이 16세 처형

루이 16세 일가는 탕플 탑에 투옥당하고 결국 국민을 버린 왕이 되어버렸다.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하는 주장을 강하게 주장했던 혁명 세력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처형당한다.  1793년 1월 21일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을 당한다. 그렇게 프랑스 절대 왕정시대는 저물었다.

 

 

루이 16세의 처형을 보고 유럽의 모든 나라는 충격과 두려움에 빠지고 프랑스에 등을 돌려버린다.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에서는 프랑스혁명을 축하하는 자리에 축하사절단을 보내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할 때 사람들은 손에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이유는 당시 사람들은 사형수의 피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의 피를 묻혀가려고 했다. 

 

기요틴 단두대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그리고 9개월 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갑자기 사형 전날 마리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다는 속설이 있는데 프랑스에는 아직도 마리앙투아네트 머리라는 표현은 흰머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1793년 10월 16일 처형 장소로 끌려온 마리앙투아네트와 수사본 노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으로 마리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은 이미 잘려있는데 단두대에 머리카락이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리를 미리 잘라놓은 것이다. 

 

죽은 그 순간에도 그녀의 죄목은 적과 내통한 반역행위, 재정낭비, 정부의 부패를 묻은 죄, 백성 기만, 왕을 타락시킨 죄, 아들과의 근친상간 등 온갖 죄목이 모두 붙었다. 또한 단두대에서 죽는 순간 그녀가 했던 말이다. 

 

 

영원히 가증스러울 이름이 역사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들과 똑같이 루이 카페의 미망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 있던 기간에 프랑스 국민의 천벌이자 흡혈귀로 기록되어 사치와 향략의 왕비로 불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애로웠고 인간적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벌거벗은 세계사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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