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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네로 황제가 폭군이 되는 과정 , 죽음

by 짱신나^^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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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아그리피나는 네로를 어떻게 황제로 만들었나? (네로 황제 되다)

 

네로 황제의 포풀리즘 성향(populism)

네로는 어릴적부터 예술적인 활동을 많이 했고 황제가 된 후 대중들 앞에서 직접 공연을 하기도 하면서 인기를 누렸고 예술가가 됨으로써 좋은 정치가,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네로의 모습을 엄마 아그리피나는 달가워 하지 않았다.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행동을 하니 간섭이 심해졌고 자신의 뜻을 위해 네로의 행동을 제약하기 시작한다. 네로를 황제로 만들고 권력의 중심에 마침내 선 아그리피나는 로마의 부흥보다는 자신의 복수와 욕망을 채우기 급급했고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주변을 측근으로 채웠으며 더욱 더 강력한 권력을 원했던 아그리피나였다. 

 

아그리피나의 권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볼수 있는 증거 : 이것은 황제의 권력을 보여주기 위한 기념 주화를 만들었고 그 주화 안에는 아그리피나가 있고 주화 속 내용은 온통 자신을 위한 내용이었다.  나를 가장 존업한 여자로 불러라, 신이 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 등 동전에는 모두 아그리피나를 칭송하는 단어뿐이었다. 

 

네로가 원로원들과 회의를 할때 아그리피나는 뒤에 커텐을 치고 정치에 시시때때로 간섭을 하게 되면서 네로는 점점 더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네로의 마음을 눈치 챈 아그리피나는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협박 편지를 쓴다. 

 

아그리피나가 네로황제에게 쓴 협박편지 내용

 

브리타니쿠스 독살

모전자전으로 네로는 엄마의 협박의 도구인 브리타니쿠스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독살을 결심, 브리타니쿠스에게 뜨거운 포도주를 권하자 브리타니쿠스는 거절한다. 그러나 네로는 뜨거운 포도주를 거절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독이 들은 찬물을 포도주에 부어 의심없이 먹이고 독살해버린다.  주변 사람들이 브리타니쿠스를 응급처지를 하려하자 간질때문이라고 잠시만 놔두라고 한다. 네로는 사망한 브리타니쿠스 시체를 최대한 빨리 수습해서 화장을 시킨 후 병사했다고 발표한다. 

 

 

 

네로의 연인 포파이아

네로의 걸림돌이 되었던 브리타니우스를 죽게되니 이제 네로는 엄마 아그리피나를 협박한다.  그리고 엄마의 측근을 철수시키고 엄마를 궁에서 내쫓고 엄마를 트집잡아 법정소송을 하도록 했다. 

 

 

엄마에게 가혹했던 이유는 원로원 의원 친구 오토의 부인 포파이아(그 당시 로마 최고 미녀)에게 빠져 내연관계로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었고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엄마 아그리피나 살해

네로는 빨리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싶었지만 엄마 아그리피나가 계속 반대를 했고 이에 엄마를 3차례나 독살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네로는 포기하지 않았고 엄마를 화해의 의미로 섬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었고 화해의 제스쳐를 보여주며 안심시킨 후 돌아가는 배를 침몰시켜 버린다. 그러나 수영을 잘하던 아그리피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편지를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자 네로는 초조함에 자객을 보내 마침내 엄마를 살해한다. 

 

엄마의 죽음을 들은 후 네로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거처를 로마에서 나폴리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못된 노예들에게 암살을 당했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소문도 퍼트린다.

 

 

아내 옥타비아 살해 

의붓 동생에 이어 어머니까지 살해한 네로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옥타비아를 살해하기로 계획한다. 옥타비아와 네로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네로는 옥타비아에게 불륜죄를 덮어씌워 그녀를 처형한다. 그리고 포파이아는 옥타비아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가져와 달라고 요청한다. 

 

 

축제 네로니아 개최

어머니가 죽고 애도하는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네로니아 축제를 개최했고(축제 이름을 네로니아) 체육, 음악, 전차경기를 개최하여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네로는 예술가로 공연마다 귀족 5000여명의 박수부대를 항시 대동하고 다녔고 큰 환호와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했고 권력의 기반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한 사건으로 인해 네로는 폭군을 넘어 악마의 이미지로 만드는 사건이 생긴다. 

 

 

로마 대화재 사건 

로마 대화재 사건 이후 네로는 완벽한 폭군 이미지로 굳어졌다.

 

64년 7월 19일 로마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은 6박 7일 동안 계속 되었던 화재는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시내에 퍼지면서 대화재로 악화 로마 역사상 가장 참혹한 화재 사건이었다. 엄청난 화재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죽었고 쉽게 꺼지지 않는 불길고 인해 로마인들은 연일 고통을 받았다. 서울의 2/3가 타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시대 역사가로 카이샤르부터 시작해 로마제국 12명의 황제를 다룬 <황제전>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네로가 로마의 도시를 많이 불만스러워했다고 한다. 너무 오래되고 추한 건물로 가득차 있고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들을 보기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네로가 화재를 보며 노래를 부르고 화재를 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정말로 네로가 화재를 냈나에 대한 증거는 없다. 화재가 나던 날 네로는 엄마의 고향 엄마가 휴양했던 안티움에 있었다. 갑자기 화재소식을 들은 불을 끄라고 지시하고 자신도 직접나섰다고 한다. 공공 건물과 개인 사저로 피해자들의 임시 숙소를 마련하는 등 황제로서 최선을 다하여 대책 마련에 애썻다.  

 

 

그리스도교인 처형 

그러나 네로가 화재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이 계속 되었고 소문이 사라지지 않자 네로는 특단의 조취를 취한다. 네로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방화범으로 그리스도교인들(기독교)을 지목했다. 그리고 처참한 방식으로 처벌을 했다. 산채로 매달아 불태워 죽이거나 심지어 짐승에게 잔혹하게 물려 죽도록 했다.

 

 

아내 포파이아 살해

대화재 다음해에 제 2회 네로니아를 개최한다. 축제에 빠져 귀가가 늦어지자 임신한 포파이아는 핀잔을 줬고 이때 네로는 아내를 발로차서 아이와 아내 둘다 죽이게 된다. 정신을 차린 네로는 이미 아내와 아이를 죽인 상태였다. 

 

스포루스와 결혼

이에 실의에 빠져있다가 아내 포파이아와 닮은 노예 소련 스포루스를 보게 된다. 네로는 그와 결혼하려했지만 로마법에 동성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포루스를 성전환을 지켜 여자로 만든 후 결혼을 감행한다.

 

 

스승 세네카 살해

황제를 견제할수 있는 원로원이 드디어 움직인다. 당시 원로원의 신망이 높았던 귀족 출신 '피소'라는 사람을 차기 황제로 내정해두고 음모를 짜게 되지만 세력 중  한 명의 내부고발로 사실을 알게 된 네로는 음모의 가담자 모두와 자신의 스승 세네카를 잡아다 죽인다. 세네카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세네카를 네로의 엄마가 죽을 때부터 죽음을 예감했다고 말하고 증기탕에 자신을 넣어 달라고 한다. 

 

 

그 이후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비치는 자신의 측근들을 모두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에 다른 동네 속주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에 가장 유명했던 갈리아 속주에 '빈덱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현 프랑스 , 벨기에)  빈덱스가 세력을 모아 원로원 의원 중 한사람 '갈바'를 찾아하고 원로원은 네로를 적으로 선포한다.  

 

자살한 네로 황제

이소식을 들은 네로는 직접 싸우겠다며 근위병들을 소집했으나 네로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로의 마지막 순간 남아있던 사람은 고작 노예 4명 뿐이었다. 절망감에 빠진 네로는 자신의 노예들과 함께 도주하지만 갈바의 세력들에게 들키고 네로는 자살을 한다. 

 

자살하면서 네로가 남긴 말은 "나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죽어야 하다니"  마지막까지 네로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은 스포루스였다. 

 

 

 

현재 전해지는 네로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네로의 기록은 두 역사가(수에토니우스,타키투스)에 의해 쓰여지고 강한 비판으로 네로의 이미지를 몰락시켰다. 차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잔영을 지우기 위해 네로의 황금궁전을 모두 헐고 그 위에 12년 동안 로마의 대표 건축 콜로세움을 지었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네로의 흔적을 지워냈다. 시간이 지나고 황금궁전의 숨겨진 일부가 발견 복원 공사를 10년 넘게 진행하여 현재는 일부정도만 공개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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