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 마을 역사
우리나라 DMZ 안에 유일하게 민간인이 살고 있는 단 하나의 마을. 바로 대성동 마을이다. 이곳은 네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마을로 유엔군 사령부의 허가 없인 접근이 불가하다. 2023년 대성동 마을 인구는 현재 46세대 18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군사분계선과의 거리가 불과 400m 이다. 철책도 없이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마주한 곳이고 폭파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직선으로 불과 4km 떨어진 곳이다.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농사할 때도 무장 경계 태세의 군인이 지키고 있다.
대성동 마을과 기동정 마을에는 철조망이 없다.
기정동과 대성동 사이에는 철조망이 없다.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철조망은 남방한계선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그곳에 200m간격으로 1292개의 군사분계선 팻말로 경계를 표시를 했으나 우발적 군사적 충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남북으로 2km 씩 물러나 경계를 만든 것이 비무장지대이다.
대성동마을과 판문점 800m , 대성동에서 북한의 기정동까지는 1.4km 로 달리면 10분 안에 도착하는 거리이다. 성인 걸음으로 대성동에서 북한까지 5분거리이다.
아래 노란선은 군사분계선으로 이 선을 넘으면 바로 북한이다. 대성동에서 군사 분계선은 400m , 대성동에서 판문점까지동경비구역 내 유엔군과 북한군이 혼재되어 경비를 섰으나 도끼 만행 사건을 계기로 공동경비구역에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이곳은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래서 이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피난길에 오른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아이러니컬하게 북한측에서 먼저 비무장지대 주민들을 다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무장지대에 남북 각 1개의 마을을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북측 입장에서는 기후적으로 기정동지역이 농사에 유리한 지역이였기 때문에 놓치기 어려웠던 곳이고 분단 전에는 북측의 기정동과 남 대성동은 이웃마을이었다. 기정동과 대성동 사이에 흐르는 사천강은 가뭄시기에는 그냥 걸어갈수도 있었고 그래서 두 마을 사이에 친척 관계도 다수 있었다.
이곳은 선전마을이기도 하다.
1987년 남북 체제경쟁의 일환으로 게양대를 만들었고 태극기와 인공기 높이경쟁을 했다. 실제도 1미터, 2미터 더 올렸고 높이에 이어 크기 경쟁도 했다.
2000년 이후 기정동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농사철이나 홍보용으로 사는 사람들만 건물관리할 때만 출입한다. 종종 돌아다니는 사람들 목격할수 있다.
대성동 마을 주민 납치
1997년 10월 17일 농사철이 아닌때는 도토리를 주워다 팔곤 했다. 대성동의 농작물은 유기농으로 인식되어 도토리 한 포대에 200만원 정도했을 정도로 높은 가격에 팔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성동 마을 주민 모자가 도토리를 줍다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군인에게 납치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정부의 노력으로 5일 만에 무사귀환하게 돼었다.
이 당시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전 세계가 북한 체제를 비웃을 때였기 때문에 체제 선전의 목적으로 납북된 사람들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김세연 납북사건
그러나 1975년도 8월 김세연 납북 사건때는 김세연씨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때 농사 일손이 부족해 외부에서 농사일을 도와줄 사람을 데려왔었는데 농사일을 돕기 위해 대성동에 들어왔다가 납북이 된 것이다. 작업할 논이 북쪽에 가까이 있었고 주민 한사람이 농사를 하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쳐다보니 무장한 북한 군인이 김세연씨를 이미 끌고 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유엔사 측에 즉시 신고를 했고 김세연의 즉각 소환을 요구했으나 월북한 사람이라고 계속 적으로 주장했고 그럼 김세연씨를 군사분계선으로 데려와 선택하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북한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김세연씨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후 북한에서 날라 온 삐라에서 김세연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남조선에서 초등학교도 못다녔던 김씨가 인민 공화국에 대학을 다닌다라는 내용의 삐라였다.
김세연씨는 북한 체제선전에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삐라에 김세연씨를 머슴이라고 소개했다. 1975년 당시는 북한이 남과의 체제 경쟁에 위기함을 느껴 체제 홍보를 위해 상당한 무리수를 뒀던 때이다. 바로 다음해에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났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Ax Murder Incident) & 폴 버니언 작전
대성동 마을은 북한이 도발할 적마다 가장 먼저 느낄수 있는 위치에 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처음으로 대성동 마을에 벙커, 대피소가 설치되었다.
또 다른 최악의 북 도발사건은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이다. 이때 대성동 마을 주민이 폭파 굉음이 들릴 정도로 컸다고 한다. 추가 도발이 염려되어 주민들은 그때 공포에 떨었다.
대성동 마을 규칙과 혜택
자유가 없는 자유의 마을 대성동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통행금지가 있는 장소이다. 유엔사령부 소속 민정반은 가구별 매일 저녁 주민들 인원체크를 한다. 매일 저녁 7시 인원점검을 실시하고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시간이다. 외부인 출입은 오전 9시~오후 5시30분까지로 제한되었다. 그나마도 외부인들의 동선에 군인이 동행한다. 그러나 이곳 남자들은 군대가 면제된다. 유엔군관할하에 있기 때문에 국방의 의무에서 벗어날수 있는것도 있으나 인구가 적은 곳이라 농업철에 남자들이 군대를 가면 농업이 되지 않기때문이고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다. 또 다른 혜택은 세금 내지 않는다.
옛날 대성동 마을 주민 자격은 정전협정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 대성동 마을 남자와 결혼한 여자였는데 여자가 결혼을 하면 마을을 나가야 됐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친인척 관계라 사실상 그 안에서 결혼하는 것은 쉽지 않아 규칙도 조금씩 바뀌어 요즘은 대성동 마을 여자와 결혼할 남자는 심의를 거쳐 마을 주민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스무살안되는 외부의 남자와 결혼해 대성동에 살길 원하는 사람은 또한 심의를 거쳐 국방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있다.
대성동 마을은 소작농들의 자손이 농지를 일군 것이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의 논밭은 주민들에게 소유권이 없고 오직 경작권만 있다. 현재는 땅 주인들은 자신의 땅이지만 DMZ 내에 있기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수 없으나 통일이 되거나 남북의 상황이 달라지면 소유권을 주장할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은 내가 사는 집과 내가 농사짓는 땅이 내것이 아닌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항상 안고 살고 있다.
대성 초등학교의 특별함.
대성동 마을안에는 유일한 교육기관 대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전교생이 30명 남짓이다. 이 학교의 위치가 북쪽의 기정동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서향이다. 그래서 혹시나 모를 안전을 대비해서 창문대신에 방탄 벽돌로 창문을 가려나왔다.
마을 주민만 다녀야 되는데 인구가 적어 폐교가 될 위기에 놓이자 마을 밖 주변 지역에서 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학신청이 쇄도하고 있어 치열한 입학 경쟁에 추첨을 통해 입학을 할수 있을 만큼 인기가 있다. 그 이유는 일주일에 10시간씩 유엔사 미군이 맞춤형 영어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어린이 외교관 체험, DMZ 국제영화제 참가, 각국 대사관 공연등 다양한 체험학습을 할수 있다. 또한 군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 안전도 보장된다.
크리스마스때는 유엔군사령부 부대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어린이들이 초대되고 졸업식때도 유엔사 관계자로부터 졸업축하를 받는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 교육을 위해 마을을 떠나야 한다. 대학졸업을 하면 마을주민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동경비구역 JSA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0회,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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