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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이야기와 문무대왕릉에 대한 논란

by 짱신나^^ 202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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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회 리뷰]


오늘의 방문지 : 경주 

주제: 천년의 고도 경주 

출연자: 문근영/ 솔비


오늘은 경주 탐사 2탄으로 

  • 황룡사 역사문화관을 방문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직접보고 황룡사터에서 실제 목탑의 크기를 체감해본다. 또한 황룡사지 도굴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 이어서 문무대왕릉을 방문에 수증릉의 위치 및 진위여부에 대해 알아본다.
  • 감은사지터에서는 감은사의 의미와 설립배경을 확인해본다. 
  • 마지막으로 국립경주 문화재 연구소를 방문해 그곳의 가장 큰 유물과 가장 작은 유물을 관람한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황룡사 건립 배경 


신라 24대 왕 진흥왕은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했다. 그즈음에 진흥황의 꿈에 황룡이 나타났고 궁궐 대신 사찰을 세우고 황룡사라 이름 붙였다. 그 이후 7세기 선덕여왕 때 자장스님이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우면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왕권 강화와 간절한 호국의 염원을 담아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었다. 


황룡사는 진흥왕때 부터 전체 완공까지 93년 걸렸다. 끝없는 증축 과정을 거쳐 약 25,000평 규묘의 동양 최대 사찰이 되었다. 

고려시대 광종 때 5번의 벼락을 맞고 전소가 되었다가 다시 여섯 번을 중수 했으나 안타깝게도 고려시대 1238년 몽골의 침략으로 전부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덩그러니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 9층 목탑 

현재 모형 제작에만 8년이 소요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 실제크기는 ?

약 80 m 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은 80m 높이로 우리나라 25층 아파트 높이와 맞먹는다. 경주 시내 어디에서 보였던 엄청난 높이의 탑이였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1400여 년전 보물이 1/10 크기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이 9층인 이유
 
신라 주변의 아홉개의 층은 아홉개의 적국을 의미한다.
-9개의 적국들: 왜, 중화,오월,탁라,응유,말갈,단국,여적,예맥

황룡사 터로 이동

드론이 내려다본 80m 목탑 높이 뷰

약 150평에 달했던 황룡사 9층 목탑 64개의 초석이 가지런히 있고 그 가운데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 심초석이 땅에 박혀있고 그 위에 덮개석이 있다.  

심초석 도굴 사건 

1964년 황룡사지에서 도굴 사건이 있었다. 도굴꾼은 공업용 잭으로 무게가 30톤인 심초석 위의 덮개석을 들어 올린 뒤 13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9층 목탑의 귀한 보물들을 도굴꾼과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 1966년 이 도굴꾼이 불국사 석가탑을 또 도굴 하려다 잡혔는데 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황룡사 9층 목탑 도굴도 탄로가 났다.  이 도굴꾼은 공범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문화재 관리 연구소의 관리인이였다.  박물관 문화재를 지켜야하는 관리자가 문화재를 빼돌린 것이다. 



문무대왕릉 


문무왕 (문무왕의 아버지는 김춘추)

: 지헤롭고 현명한 통치력
: 용맹하게 싸우는 전투력

지략과 용맹함을 겸비한 문무왕 

문무왕의 무덤을 바다에 만든 이유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하고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수중왕릉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다. 

백제를 멸망 시킨 후 김춘추 무열왕이 죽고 왕좌에 오르게 된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까지 정복한다. 그러나 당나라가 신라를 장악하려 하자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 지역까지 영토를 확보한 문무왕은 이후 병환이 깊어져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다.


나는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평생을 전쟁 속에 살아 왔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죽고 나면 이름만 남을 뿐... 홀연히 죽음의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그러나 단 하나 신라를 괴롭혀 온 바다 동쪽의 왜를 어쩌지 못했다.. 내가 죽거든 열흘 후 화장을 하고 예를 지키되 검소하게 하라. 나를 동해 바다에 묻고 나는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왜로부터 신라를 지킬 것이다. 

문무대왕릉에 대한 논란

이곳은 1967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문무대왕릉이 맞다 아니다 논란이 있어 오다가 최초 발견 후 30여년 지난 2001년 문무대왕릉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양수기로 물을 뺀 상태에서 정말한 조사를 해보니 1300여 년 만에 비밀이 드러났다. 


약간의 인위적 흔적이 있으나 의미 있는 부장품 발견에는 실패 해서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문헌에는 '장례를 치렀다' 라고만 기술 되어 유언 속 무덤이 어딘지가 불명확하다. 화장 후 어떻게 했는지가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감은사지 


감은사 의미

감은사는 아버지인 문무왕때 만들기 시작한 절인데 완성을 못하고 신문왕 2년에 완성된 절이다.

아버지(조상)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

감은사 설립 배경

신문왕 즉위 후 바로 반란이 벌어진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왕비의 아버지,신문왕의 장인 '김흠돌'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김흠돌의 딸(왕비)이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 나는게 두려워 반란을 했다는 설이 있다.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확실하지 않음 )  신문왕의 감정은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과 동시에 왕권 강화를 위한 명분이 생긴것 이다. 그때의 심정이 글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문왕이 조상들께 바친글의 내용
무섭고 두려움이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계절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조가 허물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통일신라 부흥의 염원을 담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후 진골 출신을 모두 몰아내고 진골 아래 계급 6두품을 기용한다. 감은사는 김흠돌의 역모 사건 후 왕권 강화 시기에 완성된 절인 것이다.



탑층 세는 법  

통일신라의 탑은 2중 기단에 3층탑이다. 감은사지 3층 석탑 ,불국사 3층 석탑

금당터- 부처님을 모시는 자리에 초석만이 남은 금당터



Q.사진의 통로 같은 공간을 비워 둔 이유는? 금당 아래 비워둔 공간들 용도?


꿈에 동해의 용왕이 된 문무왕이 보낸 용이 나와 만파식적(대나무로 만든 피리)을 전해주며 신문왕에게 얘기했다. 


그래서 감은사지 주변에는 이 대나무밭이 있다.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


이곳에서 가장 큰 유물 치미

치미는 무엇인가? 

한옥 건축물의 장식 기와, 용마루 양쪽 끝에서 권위와 위험을 상징하는 유물



634년에 건립된 분황사 절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분황사 건립 배경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절에 당나라 황제로 부터 선물을 받는다. 모란도를 보내오는데 선덕여왕은 얼굴이 굳는다. 


당나라 황제가 나를 놀리고 있구나 모란도에는 벌과 나비가 없었다. 향기 없는 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짝도없고, 아이도 낳지 못하는 처지를 비웃는 구나 매력 없는 꽃이라고 날 조롱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절을 하나 세우는데 그 절의 이름이 황제황 향기분을 따서 분황사라고 짓는다. 

향기가 나는 황제의 절, 분황사 

선덕여왕은 우아한 대처로 자신의 뜻을 알렸다.


이곳에서 가장 작은 유물은? 

길이가 3cm 정도 되는 금판에 화려한 장식을 새겨놨다. 

동굴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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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 신청 시 누구든 유물을 직접 열람, 관찰이 가능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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