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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콜로세움 역사 (티투스 황제의 나우마키아 어떻게? )

by 365 ^^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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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로마라고 한다. 로마의 건축은 황제의 권력과 치적을 상징하는 동시에 로마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콜로세움이다. 로마 건축 외관은 그리스 양식이나 재료는 벽돌과 콘크리트을 사용했다. 벽돌을 사용한 이유는 이전 시대 그리스는 건축물에 대리석을 사용했으나 세계를 정복하던 로마 시대에는 자신의 정복지에 쉽게 구해서 건물을 지을수 있는 벽돌이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콜로세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시기에 만들어진 콜로세움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통털어서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유적중 하나로 손꼽힌다. 둘레 527m 길이 188M , 높이 52M 최대 수용인원 5만 명인 타원형 경기장으로 시민들이 검투사의 시합이나 맹수와의 싸움을 즐겼던 공공오락 시설같은 것으로 현재 모습은 과거의 1/3 모습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지어진지 2000년이 다 되어 가는 건축물임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경이롭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누가 만들었나? 

기원전 8세기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한 로마는 본격적으로 영토확장에 나서면서 최전성기때는 오늘날의 40여개 국가와 유럽 대부분, 중동,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이룬다. 서기 69년 로마의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로마의 변방 유대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민심은 내전으로 흉흉했고 네로 황제가 반란군에 쫓겨 자살 후 1년 사이에 황제가 3명이나 바뀌었던 대혼란이었다. 로마의 동쪽 방어선을 맡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로마의 9번째 황제로 추대하며 원로원이 이를 공식 승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전선을 아들 티누스에게 맡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콜로세움을 지은 이유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라는 평민 (=중인) 출신황제가 신분이 낮은 자신을  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해준 시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폭군으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던 네로황제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시민에게 바치는 오락공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당시 검투는 로마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기 때문에 그것을 위한 역사상 가장 크고 특별한 건축물을 만들기를 원했다. 이런 선택은 정치적인 색이 깔려 있었다. 

 

시가 중심부에 위치한 네로 황제의 궁전 자리로 바다처럼 보이는 인공호수와 160개의 방을 거느린 초대형 호화 궁전인 황금 궁전 자리가 콜로세움터였다. 이 자리는 서기 64년에 일어난 큰 화재로 도시의 2/3가 불타버렸는데 사상자와 이재민이 수천에 달했었다. 이때  네로황제는 일반 시민의 주거지였던 화재지역의 땅을 몰수해 자신의 개인 소유로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궁전을 세운것이 바로 황금 궁전이였다.

 

 

 

 

 

이것은 네로 개인만이 소유했던 땅을 시민들 모두를 위한 건물을 건축하므로써 돌려주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또한 이 거대한 콜로세움에서 등장하므로써 황제의 위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에 이보다 좋은 무대는 없었다. 콜로세움 경기장은 규모나 구조에서 최고 권력자 황제가 민중의 소리를 한눈에 직접들을 수 있는 최적화된 장소이자 유일한 장소였다. 콜로세움은 단순한 오락시설일 뿐만 아니라 황제가 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정치적인 장소로써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콜로세움의 건축학적 의미

 

아치의 항연

서기 72년 콜로세움 공사가 시작되고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원형 경기장 2개를 합쳐놓은 크기였고 이 건축물에 특징은 바로 아치의 발명이었다.

아치의 향연 콜로세움

 

여러개의 아치를 만들어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리는 방식

아치를 만들 때는 우선 목조틀을 지지대로 만들어 돌을 쌓고 꼭대기에 쐐기돌을 넣어 돌의 무게를 양쪽으로 분산시켜 아치위에 더 많은 돌을 쌓게 할수 있다. 일종의 모듈방식으로 기본 단위의 통일된 양식의 부품을 생산한 후 이를 쌓아서 조립하여 완성하는 방식을 말한다. 

 

층별 다른 기둥양식

관중석은 층마다 다른 양식으로 화려함을 극대화 했다.

 

1층은 도리아식으로 고대 그리스 양식중 가장 오랜것으로 간결하고 힘찬 기둥 모양이 특징이다. 

도리아식 기둥 모양

2층은 이오니아식으로 BC 7세기 초 에게해 연안해서 발달하였으며 우아하고 섬세한 기둥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코린트식 헬리니즘 미술 영향으로 가장 화려한 장식이 특징으로 아칸서스 잎을 엮은 듯한 장식이 특징이다. 

코린트식 기둥

콜로세움 이름의 유래

무엇보다 콜로세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치에 장식됐던 조각품이었다. 이것은 네로가 자신의 개인정원에 전시했던 조각품들로 그의 개인소장품들을 공공의 것으로 만들었다.

네로의 조각품 재사용

 

또한 네로가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던 거상은 없애지 않고 태양신으로 리모델링해서 재사용했다. 거상의 이름이 '콜로서스'에서 거대하다는 뜻의 콜로세움이 유래된 것이다.

콜로서스 거상의 재탄생

 

콜로세움 공사비용은 어디서? 

당시 베스파시아누스때 로마 재정은 네로시대와 3황제시대를 거치면서 바닥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콜로세움을 지을수 있었을까 그는 콜로세움 재정을 전쟁 전리품으로 원형 경기장을 지은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전리품으로 경기장을 지었다는 내용의 비문 발견 

서기 70년 2월 아버지를 대신에 유대 전선을 지키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티투스가 전쟁에서 수레에 싣고 온 수많은 전리품들이 콜로세움 건설비용으로 사용되었고 3만여명의 노예들은 노동력으로 이용되었다.  콜로세움은 정복자의 경기장이였다. 콜로세움 건설을 추진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완공되기 1년 전에 생을 마감한다. 콜로세움의 개장은 새 황제 아들 티투스였다. 

 

서기 80년 티투스는 100일에 걸쳐 콜로세움의 개장을 축하하는 축제를 열었다.  

 

 

 

 

 

콜로세움 좌석배치 

콜로세움 안의 좌석 배치는 계층을 기준으로 했다. 가장 돈을 많이 내는 귀족들은 경기현장과 가장가깝고  경기장 바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배치되었고 귀족들은 좋은 자리를 돈을 주고 구매한다. 바닥에서 멀어질수록 신분이 낮은 계층, 돈을 적게 버는 계층이 배치되었고 가장 위쪽 불편한자리에는 노예나 하층 계급이 차지했지만 이들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했다. 

 

 

콜로세움 경기 볼거리 

※ 나우마키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는 경기 중 하나는 나우마키아라는 모의 해상전투였다. 경기장에 물을 체우고 작은 배를 띄워 나우마키아라는 모의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

나우마키아 모의해전

 

콜로세움에 어떻게 물을 채워넣었을까? 

콜로세움내에 100개가 넘는 음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로 짐작하는것이 송수로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콜로세움 경기장 주변에 수로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물이 바깥에서 이 수로로 들어와서 경기장 외곽을 따라 원로위원석 아랫단의 좌석 밑으로 흐르고 수로옆에 배출구가 있고 이 배출구로 유입된 물은 지하로 흘러갔을 것이다. 

콜로세움 수로와 배수구

현재의 콜로세움 지하는 티투스 이후에 세워진 것이고 티투스 때는 원형 경기장 바닥 자체가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대였고 목재로 만든 기둥에 의해 지탱이 되었다.  모의 해전이 있을 때는 무대와 기둥을 치웠다가 경기장이 필요할 때 다시 설치하는 식으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에서는 목조로 된 가변형 무대를 일부 복원하여 보여주고 있다. 

콜로세움 일부 복원 시킨 목조 무대

콜로세움 물 채우는 순서 

1. 모래로 덮여있는 경기장

 

2. 무대를 걷어내면 목재로 만든 기둥이 보인다
3. 목재 기둥을 제거 한다.
4. 물을 수로를 통해 흘려보낸다. 
콜로세움 경기장에 물이 채워지는데 2~5시간 예상

30개의 방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한 다음 물을 채우는데는 2~5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물의 양은 6만5천 리터로 추정한다. 

 

모의해전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로 강이나 호수에서 병사들이 해전을 재현하던 것이였는데 이것이 경기장안에 진행하면서 범죄자나 노예들을 배에 태워 한편이 모두 죽을때 까지 싸우는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맹수사냥 

또 하나의 볼거리는 맹수사냥인데 경기 후 죽은 동물은 가죽은 시민들에게 선물로 주었고 고기는 이후에 진행될 맹수 사냥을 위해 우리에 갇혀있던 맹수들에게 먹이로 주었다. 버려진 뼈는 후에 콜로세움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   

콜로세움 하수구에서 발견된 동물 뼈조각들

 

콜로세움 4층 완공

티투스는 황제가 되고 2년뒤에 죽는다. 그 후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3층짜리 콜로세움을 한층을 더 올려 4층으로 콜로세움 공사를 마감하면서 모의 해전으로 물을 채워 텅비어있던 지하공간을 각종 경기를 위한  검투사, 동물이 머물던 복잡한 대기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지하시설 부조물

도미티아누스는 출연자를 자동으로 들어올려주는 무대효과를 위해 지하공간에 승강기를 만드는 등의 대규모 지하시설공사를 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야간 경기를 도입하며 극적효과를 더하며 이런 깜짝쇼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300여년 동안 사용되었던 콜로세움은 서기 442년 지진으로 무너지며 그 기능을 잃게 된다. 

 

[출처세계테마여행, 다큐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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