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의 사기 진작과 효율적 전쟁 도구를 만들기 위해 군인과 심지어 민간인에게까지 항복은 엄청난 수치로 인식시키며 1억 총 옥쇄작전으로 천왕 일왕을 위해 끝까지 저항하게 만들었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자살특공대 가미카제였다. 가미카제는 오직 자실 공격만을 위해 설계된 것으로 일본은 인간을 전쟁 소모품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 상징
가미카제의 유래
가미카제의 유래는 한국의 역사와 연결이 되어있다. 고려시대 때 원 간섭기 원나라의 고려 침략 시기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한다. 그러나 큰 태풍에 여몽연합군은 철수하게 되고 이것을 지켜본 일본은 신이 일본을 지켜주는 바람이라는 뜻의 가미=신 카제=풍 '신풍'의 뜻을 다시 사용하면서 신이 불어준 바람으로 폭탄을 싣고 날아가 미 군함에 던지겠다는 의미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탄생하였다.
그들은 일왕을 위해 자살했다?
가미카제를 제안한 사람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으로 미드웨이 해전 이후 유능한 파일럿과 전투기를 대거 잃은 일본은 전세가 악화되자 가미카제라는 자살특공대를 만들었다. 가미카제의 주요 목표는 미군의 항공모함을 격침시켜 전력과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죽음을 담보한 역사상 최악의 전술이었고 일본 수뇌부는 이를 사무라이 정신으로 포장해 만행을 미화시킨다.
1943년 10월17일 비행기에 폭탄을 실은 채 미국 군함에 돌격했던 가미카제, 미국은 다가오는 일본 전투기에 대응사격을 했는데 그대로 달려와 들이받았다.
일본은 가미카제 대원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때 '천왕 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맹스럽고 명예롭게 죽었다고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 대위였던 세키 유키오의 유언 속 내용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처음 명령이 내려졌을 때 군 내부의 가미카제 대원들도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생존자 가미카제 대원의 증언
전쟁에 투입된 가미카제 대원들은 3~6개월 정도 훈련 후 바로 투입된 미숙련 조정사도 있었고 대부분 10~20대들이었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양과 같았고 어떤 이는 서 있을 수조차 없어서 지상 요원들이 비행기에 밀어 넣기까지 했다는 증언이 있다. 도망가려는 이들에게 약물을 먹이고, 술먹이고, 탈출을 막기위해 조종석 캐노피를 용접까지 하면서 그런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다. 출격 호위 전투기들이 도망가는 가미카제를 추격, 격추하기도 했다.
가미카제 탁경현
가미카제 특공대에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일본 라디오 방송에서 한 여성이 애타게 사람을 찾고 있었다.
토메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었다. 토메는 전쟁 당시 군인 전용 식당을 운영했는데 그녀의 식당을 오가는 수많은 일본 군인 사이에 눈에 띄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당시 24세 한인 청년 탁경현이었다. 탁경현이 전사를 한 것을 안 토메는 방송에서 탁경현의 유족과 친구를 찾았던 것이다. 광복을 2달 앞두고 그는 그렇게 희생되었다.
수십 명의 가미카제 조선인 부대원들은 일본의 이해할 수 없는 자살 작전에 희생됐고
이들은 현재 일본의 전범들이 주로 배향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어 일본의 침략전쟁 미화에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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