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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원간섭기 공민왕 업적과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등장 배경

by 짱신나^^ 202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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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3회]

 

오늘의 탐사지: 경북 영주 부석사

주제:  공민왕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 최수종

 

 

영주 부석사

 

부석사는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지로 왕건이 궁예와 이 길을 걸었다. 또한 이곳은 고려 말 공민왕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부석사 안양루
 
왕건이 세운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고려 918~1392
고려 왕건 역<최수종>

 

고려는 918년 왕건이 건국한 나라로 1392년 34대 공양왕까지 475년 동안 존속한 나라이다. 신라 말 지방 유력세력 토호의 아들이었던 왕건은 태봉의 왕,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왕이 된다. 후삼국을 통일해 함께 어우르는 정치를 한 왕건이 세운 고려는 고려 말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부패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 받고 피폐한 삶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안양루 

부석사 무량수전 들어가는 입구

자연스레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도록 지어진 안양루 
안양루의 절경
 
원간섭기 100 여 년 동안 왕 이름 앞에 붙었던 충성 충 (충렬왕, 충선왕등), 왕의 이름 조차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던 고려 후기였고 더 큰 문제는 내부의 적 친원파 즉 권문세족(권력 있는 문벌의 세력 있는 족속)이었다.  
 
토지가 권력이었던 고려 시대는 울타리로 경계를 나눌 수 없어 산과 하천으로 토지를 구분했기에 백성들이 땅을 사고 싶어도 송곳 하나 꼽을 만한 땅도 없었고 이런 대농장에서 백성들을 수탈했고 세금을 내지 못한 이들은 노비로 두게 된다. 세금을 내던 평민들이 노비가 되자 열악해진 고려의 재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던 권문 세족이 득세하던 시대가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이 마주했던 고려의 참혹상이었다. 
 
 
신진사대부 등장 
 
이러한 상황에서 중소지주의 자식들이 중앙으로 올라온다. 이들을 신진 사대부(유학을 공부한 사대부)라 불렀다. 이러한 신진사대부의 양 날개가 정도전, 정몽주였다. 또한 원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명나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비교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 18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배흘림기둥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가운데 부분이 불룩해 마치 배가 나온듯한 모양의 기둥 

 
고려 공민왕이 쓴 현판 
부석사 무량수전의 공민왕 필체

 

공민왕

 
시험 단골손님인 공민왕이 나오면 답은 반원 개혁정치와 반원 자주정치가 답이다. 
 
원 간섭기에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시대 왕의 세자로 끌려가면 원나라에 의무적으로 볼모로 끌려가 원 나라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왕이 된 세자들은 원나라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엄마와 아빠가 모두 고려인으로 핏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고 세계 최고의 제국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부정 부퍠가 만연하고 있었던 원나라와 점점 커지고 있던 한족들의 세력 명나라가 커지고 있었다.
 
 
 
 
 
 
 

공민왕의 업적 

 
공민왕은 즉위 하자마자 몽골식 변발과 복장을 금지한다. 격하 된 고려의 기관명을 복구 시키고 원나라의 고려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을 일부 폐지 시키고 군사를 일으켜 빼앗겼던 함경도를 수복 한다.
 
그 시기에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의지하고 있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밭전 백성 민 ]을 설치하고 권문 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불합리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풀어주는 일을 했다. 
 

 

원나라는 이때 명나라와 전쟁 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거침없이 반원 자주 정책을 이어나갔다. 

 

고려 말 격동의 시기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시기에 원나라의 황후 기황후의 힘을 바탕으로 고려를 장악하고 있던 기철 일당은 왕을 함부로 대할 만큼 극에 달했던 기철 일당의 만행은 심각했다. 
 
기황후와 기철의 어머니를 위해 연 생일잔치를 열었는데 사치의 끝을 보여준 성대한 잔치 때문에 고려의 물가가 상승할 정도였다.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외면한 채 사치스러운 잔치를 연 기철 일당이 공민왕 눈 밖에 나자 역모를 꾀한 기철 일당과 숙청을 계획 공민왕의 대립이 있었다. 
 
 
 
 
 
 
 
기철 일당을 숙청하는 것은 원나라와의 전쟁을 의미하는데 당시 명나라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국제 정세를 고려해 볼 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공민왕은 기철 일당 숙청을 감행하고 빼앗긴 영토까지 되찾았지만 이 소식은 기철의 동생 기황후에게 전달이 된다. 그래서 기황후는 1364년 원나라의 1만 대군을 파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공민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보내고 이들은 원나라 군대를 막아낸다. 
 

 

그러나 측근의 배신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공민왕을 이어 왕이 된 공민왕의 아들 우왕은 불과 10살이었다.

 

 

그래서 어린 왕을 대신해 다시 실권을 잡은 권문세족 친원파의 복귀가 이루어진다.
 
 

 

▼고려 말 조선 초 관련 내용

 

☞정도전 이야기

 

정몽주 최후와 선죽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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