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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다산 정약용 유적지(정약용 생가)에서 알아보는 정약용 생애와 저서들

by 짱신나^^ 2020.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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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8,39회]

 

오늘의 탐사지: 다산생태공원, 정약용 유적지

주제: 다산 정약용 생애 및 저서들
출연자: 설민석 ,김세정, 영탁

 

 

정약용 유적지 

정약용 유적지
정약용 유적지

 

위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월요일 휴무 매일 09:00 - 18:00 입장 가능 시간 9:00~17:30입장료 무료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누구인가?

 

영조, 정조 때 집권 세력은 서인 출신 노론으로 숙종 때 장희빈의 최후와 함께 몰락한 남인세력이었다. 정약용은 이 남인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죽은 해 임오년(1762년)이다. 정약용은 대과를 보기 전에 치르는 소과 생원시 시험에 합격하고 대과 시험 전에 만난 정조와 만나게 된다. 당시 나이 22세로 정조는 정약용을 아꼈으나 시험 운은 좋지 못해서 대과에 응시한 지 다섯 번 만에 합격한다. 


드디어 합격하여 정조 앞에 선 정약용은 정조의 명을 받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부정 부패한 수령들을 고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심지어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 신부 이승훈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 신부 이승훈

 

조선시대 천주교의 문제점은 주님앞에 평등으로 유교 국가였던 조선 시대는 군군, 신신,부부, 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사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엄격한 계층이 존재했던 조선시대였는데 천주교는 모두의 평함을 주장하며 조선사회의 위계질서를 흔들었다. 우상숭배 금지 (유일신 사상) 하느님 외 다른 신은 금지였는데 조선 시대에 가장 중요시했던 조상 숭배로 부모님의 제사도 지내야 하는데 .... 


그러던 어느날 이상한 고발이 접수되는데 1791년 진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윤지충이라는 사람이 부모님의 신주를 불태웠다. 

 

신주를 불태워버린 윤지충
신주를 불태워버린 윤지충

 

천주교의 주장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친상 때 신주를 불태웠는데 그 윤지충이 정약용과 친척이었다. 
정약용도 윤지충과 같은 천주교인이었고 점점 종교가 문제 되기 시작하며 때를 놓치지 않고 노론 벽파(정약용의 반대파)는 정약용을 죽이라 상소한다. 그러나 윤지충을 사형시키는 선에서 급마무리 시키고 정약용을(34세 되던 해) 지방 작은 역의 역장 (5개월근무)으로 좌천시킨다. 

 

그 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2년간 근무 (1797년) 하면서 직접 현장을 살피며 훗날 그가 목민관 지방자치 단체장의 정무 지침 백과사전인 <목민심서>의 자양분이 된 것이 그때였다. 

 

그 이후 다시 궁으로 컴백 당시 38세 지금의 법무부 장관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상황은 '사문난적'라고 하여 유교 이외에 다른 학문 이야기만 꺼내도 학문을 어지럽히는 무리로 판단해 바로 처벌 받던 시기였는데 이런 가운데서 정약용을 절대적으로 후원했던 정조가 승하한다.


정조가 죽은 뒤 노론 벽파로부터 화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정약용은 39세에 고향 남양주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를 만들었다. 그것이 '여유당' 이다. 


정약용 생가 여유당

다산 정약용의 생가 &amp;#39;여유당&amp;#39;
다산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

 

다산의 많은 호 중 하나인

 '여유당' 


는 '머뭇머뭇하다'의 뜻 는 '조심조심 망설이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던 정약용의 가슴 졸임이 나타나는 마음을 호로 표현한 것이다. 

정약용 생가 여유당 안쪽
정약용 생가 여유당 안쪽

다산 정약용은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생가

여유당 생가 행랑
여유당 생가 행랑

 

그러나 스스로 낙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인 노론은 정약용을 공격한다. 정약용은 4남 1녀 중 막내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중 정약종 형이 천주교 성물을 숨기다 발각되어 이 사건을 꼬투리 잡아서 셋째 형 정약종을 참수하고 남은 동복 형제 둘째 형 정약전, 정약용은 유배형으로 나주에서 헤어지게 되고 두 형제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그렇게 40세 때 가족을 떠나 머나먼 강진으로 유배를 가고 형은 16년 만에 돌아가시고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 동안을 보낸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

유배생활 당시 정약용이 머물던 곳 다산초당
유배생활 당시 정약용이 머물던 곳

 

강진으로 유배를 보낸 이유는 호남에 천주교 신자가 많아 그들을 향한 경고의 메세지였다. 정약용을 본보기로 천주교인들을 위협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하면서 강진 유배지 차밭 옆에서 생활하며 얻게 된 호 '다산'이다.    
가족을 떠나 머나먼 유배길에도 굴하지 않고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강진 유배 생활에 찾은 삶의 방향 4가지 [사의재]

사의제 강진 유배지 푯맛
사의제

 

첫째 생각을 맑게둘째 용모는 엄숙하게셋째 입은 무겁게넷째 행동은 진중하게


<여유당전서>
유배지에서의 8개월간 방황을 끝내고 다시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옛날에 생각해 냈던 것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 작품들을 모은 것이 바로 <여유당전서> 500여권 이다. 강진유배생활에서만 500여권의 책을 집필한 것이다.

 

여유당전서
여유당전서

 

<여유당전서>는 후손들이 정약용의 저술을 총정리한 문집으로 오늘날 도서 기준 100~180권 정도 분량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학 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책이다.  

 

 

 

정약용의 저서들 

 
정약용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해결책을 써나가는데 <여유당전서>500여 권 중  
 
대표적인 3부작<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경세유표
 

 

'경세' 는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
'' 유배지에서 유언으로 남긴다는 의미
'' : 임금에게 바치는 전언

 

세상을 다스리는 법&#39;을 전하고 싶었던 정약용의 &lt;경세유표&gt;
11살에 왕이 된 순조를 위해 유언으로나마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전하고 싶었던 정약용의 <경세유표>

</경세유표>

 

중앙정치제도 개혁이 담겨있고 이호예병형공 조선의 장관부처였던 부패한 6조 모두의  개혁을 논함은 물론 토지구획, 과거제, 조세제도까지 중앙부터 지방까지 '세상을 다스리는 법' 을 총망라했던 책이 <경세유표>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가 중앙 안정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지방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마음가짐을 다루고 목민관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정약용이 목민관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담은 책이 목민심서다.  
 
목민심서
목민심서

 

 
목민심서의 내용에는 목민관 정치인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옛날에는 백성만이 존재했던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어진 어른이 이장이 되고 지도자가 되고 그 지도자들이 또 지도자를 뽑아 왕이 나오고 천자가 되고 황제가 생기니 이 모든 권력을 부여한 것은 백성이다. 그러니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지도자가 지도자 답지 못하게 되면 백성은 그를 바꿔야 한다는(=천자교체설)를 써놓았다. 
 
 
흠흠신서
 
흠흠은 신중하고 신중하다. 일종의 법률학책이라고 보면 되는데 예로 죄수를 다루는 유의사항을 담고 있다. 

흠흠신서 뜻
흠흠신서 뜻
흠흠신서 표지

 

140여 건의 사건들을 정리한 책으로 예로 목을 매달아 죽었을 때 타살 여부 판별법등 사건에 대한 프로파일러 적인 내용도 들어있는 책이다. 
 
 
 
천연두를 '마마' 라고 부른 이유
 
천연두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붙여준 최상의 존칭어 '마마' 를 붙였고 또한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는 천연두를 손님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그 당시 강력한 전염성으로 온 마을의 생명을 빼았아 가고 치사율 30% 3명 중 1명은 죽고 죽든 살든 걸리게 되면 무조건 얼굴에 상처를 남기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정약용 눈썹 중간의 천연두 흉터
정약용 눈썹 중간의 천연두 흉터

 

 
마과회통 
 
정약용은 9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천연두와 각종 질병으로 6명의 자식을 잃었다. 이렇게 천연두에 걸려도 의사가 없고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책을 직접 편찬한다.

 

마과회통
마과회통

 

항체의 개념을 연구하게 된 다산이지만 결국 그 연구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75세에 눈을 감은 정약용. 
 
 
지석영의 종두법
 
1879년 종두법(천연두 예방법) 관련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석영은 천연두 백신이 일본으로 먼저 들어온다는 소문을 들고 20일을 걸어서 부산으로 간다. 

종두법 개발자 지석영
종두법 시초 지석영

 

부산 재생병원으로 가서 2개월간 일본인 의사에게 종두법을 배워 와서 조선 팔도 전체에 보급한다. 부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처남이 사는 충주에 들려 어린 네 살 짜리 처남에게 첫 종두법 균을 주사한다. 
 
비록 지석영이 종두법을 완성시켰지만 그 연구의 시초에는 정약용이 있었다. 그 결과 WHO(세계보건기구)의 공식 선언으로 인간이 이겨내고 승리한 바이러스 ,멸종 바이러스가 마마, 천연두다.
 
 
 
 
 
 

다산 정약용의 묘지 

 

자찬모지명은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묘지에 새겨 적은 글로 회갑이 되던 1822년 정약용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직접 작성하고 자신의 사상과 생애,업적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산 정약용 묘지
다산 정약용 묘지

 

 
자찬묘지명을 쓴 이유 
 
본인의 업적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본인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직접 기록한다.
 

정약용의 악연 서용보

 
정약용이 1794년 경기 지역의 암행어사였던 시절 그 당시 서용보는 지금의 경도지사 경기관찰사로 재직 중이었다. 정조가 능행을 자주 가던 시절에 왕의 능행을 위해 다리를 건설하려던 서용보는 건설 비용 마련을 위해 관청 곡식을 백성들에게 판매했는데 거기서 높은 이자로 폭리를 취하다가 결국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정약용은 서용보의 행적에 대한 보고를 왕에게 했고 서용보는 결국 처벌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정약용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그 후 정양용이 신유박해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승승장구하게 되는 서용보 

서용보 직책
서용보 직책

반대 세력의 위협을 피해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한 정약용에게 기어코 유배를 보냈던 이가 바로 서용보였다. 이뿐 아니라  당시 수렴청정 중이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정약용을 석방하고자 하자 또다시 반대한 서용보로 인해 

18년 유배생활을 하게 된 정약용이었다. 유배생활에서 저술한 책이 조정에까지 소문이 나자 정약용을 다시 등용하자라는 여론이 형성되지만 또다시 권력의 최고봉 영의정이 된 서용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자찬묘지명엔 서용보에 대한 언급이 두 차례 정도 나온다.

자찬묘지명 내용
자찬묘지명 내용
자찬묘지명 내용
자찬묘지명 내용

 

 
정조 능행시 설계했던 배다리를 설계 했던 것과 수원화성 설계에 참여했던 것 등 정약용의 업적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다.  그 당시 정조 승하 이후 <조선왕조실록> 책임자는 서용보였으므로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정약용 묘
다산 정약용 묘
다산 정약용 묘

 

정약용이 15세 때 부부의 연을 맺은 정약용과 홍씨 부인은 긴 세월을 멀리 떨어져 지낸다. 다산 정약용의 묘에는 부인 홍씨와 합장이 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 묘비
다산 정약용 묘비

 

하피첩 

홍씨 부인은 남편에게 결혼 30주년에 물건을 하나 보내는데 그것은 시집 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였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담항색으로 색이 바래버린 아내의 다홍치마였다. 정약용은 아내가 보내온 다홍치마를  잘라서 자식들에게 특별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정약용의 <하피첩>이다.
 
하피첩

 

 

하피란? 궁궐에서 비나 빈이 입던 붉은 치마를 일컫는 옷으로 6.25때 실종때 하피첩은 2004년 수원의 한 고물상 파지 수레에서 발견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총 4권 가운데 돌아온 하피첩은 3권이다. 하피첩에는 학문하는 방법과 이유, 인간관계 생계를 꾸리는 방식 등 폐족의 자손으로 사는 방법과 함께 두 아들에게 바라는 정약용의 속내가 솔직하게 드러나있다. 

 

경직의방
경직의방 :&nbsp;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살아갈지 교훈을 남긴 글이다.

 

어머니 치맛자락에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치맛자락에 스며있는 부모의 체취와 그 뜻이 함께 담겨 있다면 이것에 쓰는 것이 더욱 진한 감동으로 남을 것 같아서 어머니 치맛자락에 써 보낸다고 했다. 

 

 
회근시 

이 시를 결혼 60주년 3일 전에 쓰고 결혼 기념일 당일 날 돌아가셨다고 한다.    

회근시 내용
회근시 내용

 

 

정약용은(57~75세) 1818년 18년의 유배생활을 끝으로 57세에 고향 남양주로 돌아와 남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남양주에서 벗들과 회포를 풀며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던 여유로움이 담겨 있는 듯한 고향.
 

정약용이 태어난 남양주 그곳에 위치한 다산생태공원
정약용이 태어난 남양주 그곳에 위치한 다산생태공원

 

남양주는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오랜 벼슬과 유배 생활 끝에 돌아와 여생을 마친 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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