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이 북으로 간 이유
1001마리 소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은 정주영 회장은 민간인 최초로 육로를 통해 방북한 날이 1998년 6월 16일이다. 소떼 방북은 전 세계가 주목한 사건으로 실향민 출신 고 정주영 회장이 휴전선을 넘어 고향 땅을 밟는다. 남북 분단 이후 최초 육로 DMZ 개방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1989년 1월 남한 기업인 최초로 북한 땅을 밟는다. 그리고 10년 뒤 북한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와 남한에서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고 이 빚을 갚으려 2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의 소떼를 북에 전달했다. 소판 돈 70원으로 1995년 세계 부호 랭킹 9위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현대 아산' 은 정주영 회장의 강원도 고향이다.
1001마리의 의미
1마리의 의미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뜻에서 한마리를 더 보낸 것이다. 1차 500마리 중 100마리는 임신 상태였다. 농사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모든 소는 방목해서 기른 최고급 한우들이다. 처음에는 암컷, 수컷 반반 보냈고 2차 방북때는 암소를 더 많이 보내 소가 북한에서 번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심하게 신경 쓴 정주영 회장이었다.
소를 보낸 이유/ 북한이 육로를 개방한 이유
정주영 회장은 이미 1989년에 김일성을 평양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3년 뒤 1997년 한국에는 IMF가 왔고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정부가 나서기 힘든 부분을 기업 차원에서 움직여주길 기대했던 북한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정부로 허가를 받고 북한에 육로로 가겠다고 제안했을 당시 북한은 육로 개방은 놓고 고민이 많았다. 판문점 바로 뒤로 개성 공단이 있었고 이 지역은 군사 밀집 지역으로 정주영 회장이 넘어올 시 군사력를 재배치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처음에 김정일은 육로 개방을 거부했고 판문점까지 오면 전용헬기를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이때 정주정 회장이 헬기에 소 500마리가 갈수 있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최악의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소만 보낸것이 아니고 이후 사료도 주기적으로 보내고 소를 실은 트럭 100대도 기증했다. 현재까지 현대 마크를 제거하고 모두 사용 중이다. 당시 북한은 일본차를 많이 사용했으나 이 현대트럭이 간 이후 한국차에 대한 이미지도 바뀌었다.
세기의 만남 김정일, 정주영
당시 대통령도 정식으로 김정일을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주영 회장이 김정일을 만나는지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차 방북때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998년 10월 30일 2차 방북때 정주영 회장이 묶고 있는 북한 숙소로 늦은 밤 10시 25분쯤 김정일이 직접 찾아왔다. 45분간 이뤄진 두 사람의 대화로 세기의 계약이 성사된다.
금강산 개발 의정서 계약 체결
1989년 정주영 회장이 첫 방북했을때 이미 '금강산 관광 개발 의정서 계약' 체결이었다. 1998년 1차 소떼 방북때 합의가 이루어졌고 10월 2차 방북때 김정일을 직접 만나 확답을 받은 것이다. 6년간 9억 4200만 달러 투자 금강산 50년 독점 개발권을 얻었다. 이렇게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이 성사된다.
금강산 관광에 7000억원을 투자 1998년부터 적자였다가 육로관광 시작된 2003년, 2004년 후 흑자로 전환되었고 관광중단 직전 해 2007년 영업이익이 197억원이었다. 그래서 투자비용을 회수하고도 남는 비용이었다. 금강산 관광으로 북한이 벌어들인 수입은 한해 1억 8천달러로 1998년 환율로 약 1800억원정도였다.
김정일은 19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북한 최악의 식량난 고난의 행군, 전력난등 북한이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북한은 간절했다. 이때 대북 사업가로 위장한 흑금성이 남북 광고(이효리와 북한의 조명애)를 성사시켰던 시기이다.
첫 금강산 관광 투어 금강호
정주영회장과 승무원 포함 승선 인원 총 1365명이 승선했다. 4박 5일의 일정으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어 1998년~2008년까지 10년간 진행되었다. 배로 간 이유는 북한에 숙박시설이 없어 배를 타고 간 것이다.
금강산 관광 의미
금강산 관광은 이산가족 상봉과 연결이 되어 있다. 1971년 이산가족 상봉이 처음 추진되고 남북 관계 악화로 미뤄졌던 이산가족 상봉이 1985년 처음 이루어졌다. 이후에 이산가족 상봉의 물꼬를 튼 것이 금강산 관광이었다. 첫 출항에 실향민이 많이 탔는데 전체 관광객 889명 중 450명이 실향민이었다. 이를 계기로 6.15 남북공동 선언이 진행되었고 이것이 2차 이산가족 상봉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은 2008년 박왕자씨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피격되면서 중단된다. 2003년 정주영 회장이 개성공단 착공 이후 남북교류 협력 사무소를 만들었는데 이 건물에 한국인과 북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그리고 2010년 대북제재로 폐쇄 후 2018년 재개되었다가 2020년 6월 16일(소때 방북날짜와 같음) 방북 22년 후 소떼 방북의 산물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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