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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건 2008년

by 365 ^^ 2022. 8. 1.

[이전 내용] 현대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이야기

 

2008년 북한 금강산에서 50대 여성이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금강산 관광 중 한 사람은 평범한 50대 가정주부 박왕자 씨였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은 남북 교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경색의 상징이 되었고  금강산 관광은 10년 만에 중단되었다.

 

금강산 관광 중 50대 가정주부 박왕자씨 사망
금강산 관광 중 50대 가정주부 박왕자씨 사망

 

금강산 관광 시작 

 

1998년 11월 18일  1001 마리 소떼를 몰고 방북한 현대 정주영 회장을 시작으로 금강호를 타고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진다. 2003년 마침내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금강산 육로관광길도 열리게 되면서 그렇게 10년간 이루어진 금강산 관광이었다. 금강산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만 약 193만 명에 이른다.

 

금강산 관광 중인 인파
금강산 관광 중인 인파

 

금강산 관광 육로길
금강산 관광 육로길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출입국 사무소에서 입국 허가서를 작성 후 북한으로 이동한다.  해상 경로는 현대가 해외에서 임대해온 유람선으로 운행했고 북한의 통제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였으나 육로 관광은 달랐다. 육로는 우리 관광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를 넘어서 북한으로 가는 루트로 금강산에 도착하기 전 한번 더 신원조회를 했던 북한이었다.

금강산 관광 당시 츨입국사무소 모습
금강산 관광 당시 츨입국사무소 모습
금강산 관광 버스
금강산 관광 버스



박왕자 씨 사망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을 하던 중 새벽 박왕자 씨는 산책을 하기 위해 호텔방을 나와서는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녀가 2M 높이의 펜스를 넘어 군사통제구역으로 들어갔다고 북한군은 주장했다. 사망한 여성은 박왕자 씨로 평범한 가정주부였고 생일을 맞아 4명의 친구와 2박 3일 일정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결혼 후 친구들과 떠난 첫 여행이었다.

 

절규하는 박왕자씨 유가족
절규하는 박왕자씨 유가족



친구들은 금강산행 버스에 올랐는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박왕자 씨는 지하철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30분 정도 늦었고  출발부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사망 전 박왕자 씨 행방
그리고 금강산 여행을 즐기고 여행 마지막 날 새벽 4시쯤 혼자 방을 나온다.

 

새벽 4시 호텔 방을 나서는 박왕자씨 모습
새벽 4시 호텔 방을 나서는 박왕자씨 모습

 

1시간쯤 뒤에 친구들이 깨어나고 박왕자 씨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해돋이를 보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2시간이나 지났는데 박왕자 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전 9시 30분 북한 측에서 박왕자 씨가 총에 맞고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통보 내용이었다.

 

사망 후 남한 조치 

북한 통보 이후 4시간 만에 청와대에 보고가 되고 정부는 빠르게 합동 대책반을 구성하고 피격 사건 다음날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시켰다. 사고 당시 1300여 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에 있었다. 그러나 관광객 전부 긴급 철수를 하고 예약되었던 금강산 관광도 모두 취소가 되었다. 

 

 

북한 입장 발표
그러나 북한은 대한민국 조사단 방북을 일절 금지시켰고 북한은 피격 사건 다음날 나름 진상조사를 한 북한 측 대변인 담화문을 발표한다.

 

북측 담화문 내용
북측 담화문 내용

남조선 관광객이 관광구역을 벗어나 북한 군사통제구역 깊이 까지 침범해  북한 측에서 공포탄을 쏘며 경고까지 했으나 통제에 따르지 않아 두 발의 사격을 했다는 내용이다. 담화문이 달랑 한 장 밖에 안 되는 분량으로 진상조사에 걸린 시간은 한나절밖에 되지 않았고 너무 무성의한 북한의 태도였다. 

 

북측이 주장하는 박왕자씨 동선
북측이 주장하는 박왕자씨 동선


더 압권인 것은 사건의 책임을 한국에 있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에서 사과할 때 까지는 관광객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건 발생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만 단서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남측 사건 진상 파악 내용


의혹 1. 
당시 박왕자 씨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박왕자 씨가 높이 2m의 펜스를 넘어 북측 초소 앞까지 왔다가 500M 뛰어서 도주를 했다고 주장

 

북한 초소쪽 박왕자씨가 뛰어남었다는 팬스
북한 초소쪽 박왕자씨가 뛰어남었다는 팬스



 의혹 2
북한에서 주장하는 피격 시간은 오전 4시 55분에서 5시 사이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향해 멈추라고 경고했으나 뛰어서 도주했고 매뉴얼대로 총을 쐈다고 주장. 그러나 이날 해가 뜬 시간은 5시 11분으로 충분히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시간이다.

 

북한측 주장 새벽 밝기, 실제 시간대 밝기 비교 사진
북한측 주장 새벽 밝기, 실제 시간대 밝기



목격자 1. 
당시 그 해변가에 다른 관광객도 있었다. 통트는  것을 보고 있던 목격자가 자신의 앞으로 한 분이 걸어서 해변에 바짝 붙어서 걸어가셨고 여성인 것도 식별했고 검은색 옷 입은 것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후에 총소리도 들렸고 비명도 들렸다고 한다.

 

목격자 증언 내용
목격자 증언

 

목격자 2. 
탕 소리가 났을 때 근처에 시계를 보니 5시 15분에서 20분 사이였다고 한다.  

 

목격자 2 증언 내용
목격자 2 증언 내용



목격자가 찍은 증거 사진들

 

증거사진 1 동트는 중 주변이 이미 환한 상황
새벽 5시 13분 찍힌 증거사진 2
새벽 5시 13분 찍힌 증거사진 2
새벽 5시 16분 찍힌 증거 사진 3


환한 아침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확인된다. 이 사진을 찍던 바로 그 시간에 총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고의로 조준사격했을 가능성 

북한 주장대로 라면 공포탄 1발 + 실탄 3발을 쐈고 그중 두발에 맞아 숨졌다고 했으나 관광객들이 들은 총성은 2번의 총성만 들렸다고 한다.


박왕자 씨의 시신에서 두 발의 총상 자국이 발견되었는데 두발 모두 관통상이었다. 오른쪽 등 뒤에 맞은 총알은 오른쪽 가슴을 관통했다. 다른 한 발은 오른쪽 둔부를 뚫고 들어간 총알은 왼쪽 둔부를 통과한 것이다. 박왕자 씨의 셔츠 끝에도 관통한 총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주시, 서있을시 총탄 흔적 다름 비교사진
박왕자씨가 도주했다면 원피스에만 총탄흔적이 발견될것이지만, 원피스와 상의 양쪽에서 총탄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 박왕자씨는 뛰지 않았다.



우리 정부의 합동 조사단 결론
금강산 관광구역 설치된 펜스는 군사용 철책이 아닌 민간용으로 호텔 간 경계선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왕자 씨는 피격 당시 서있었거나 천천히 걷고 있었고 박왕자 씨를 쏜 북한군은 100m 내에서 조준 사격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등과 둔부에 명중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박왕자 씨의 허벅지에 약간의 조개껍데기 파편이 있었고 이는 북한군이 한 발을 쏘면서 조개껍질 파편이 박왕자 씨의 무릎에 튀자 박왕자 씨는 섰을 것이고 서있는 틈에 북한군이 그대로 박왕자 씨를 조준 사격했다는 결론이다.

 

사건 이후 북한이 취한 행동
사건 발생 열흘만에 박왕자 씨를 저격한 북한군의 정체가 동아일보에 최초로 보도되었다. 17세 신참 여군이 쐈다는 내용으로 관계자에게 들은 정보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왕자 씨를 사살한 여군에게 1급 국기훈장을 수여했다고 알려졌다. 

 

동아일보에 보도된 신참여군이 쐇다는 내용
동아일보에 보도된 신참여군이 쐇다는 내용

 

북한의 합의서 위반 내용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한 북한은 적대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들은 보호받을 수 있다고 총기 사용은 더욱 엄격하게 금지된 제네바 협약에 사인한 북한은 스스로 국제 협약을 위반한 것이고 금강산 관광협약 당시 남북 협력 사업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대비하여  남북 합의서를 작성했었다.

 

남북합의서 위반 내용1.
남북합의서 위반 내용1.
남북합의서 위반 내용2
남북합의서 위반 내용2
남북합의서 위반 내용3
남북합의서 위반 내용3


합의서에는 신변안전보장 내용이 있고 한국인이 금강산 내에서 법질서를 위반할 경우 중지시킨 후 사건 내용을 남측에 알린 후 조치를 취하는 순서이다. 또한 엄중한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쌍방이 별도로 합의하여 처리한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합의서 내용을 전혀 따르지 않았고 북한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단 하나의 행위로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우리 측 조사 결과 북한 측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조사를 요청했으나 북한 측은 수신거부를 했고 이제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당시 200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안보포럼이 열렸는데 한 중일 외교 장관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에서 호소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무응답.

 


피격 사건 이전 북한의 남한 관광객 억류 사건

 

이 사건의 전조 사건이 있었다. 금강산 관광을 갔다가 북한에 6일 동안 억류를 당했던 평범한 주부 민영미 씨가 있었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관광객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귀순자들이 내려와 남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로 인해 북한 출입국관리소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신분 보도 내용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신분 보도 내용



처음에 이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 아산에서는 자체적으로 수습하려 시도했었기 때문이다. 북과 비공개 협상을 진행했고 북한의 억류로 인해 원래 날짜보다 하루 늦게 귀가하면서 언론을 통해 공개된 케이스이다. 억류되는 기간 동안 북한군 4명이 총을 들고 서서 자신을 감시, 욕설과 고함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사건의 진실은 
금강산 하산 중 북 감시원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이다. "남조선은 귀순자들이 오면 바로 죽이지 않습니까? " 이에 민영미 씨는 " 아니오, 다들 잘 살고 있어요 " " 통일이 되면 우리 함께 한국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네요"   흔히 우리가 나누는 덕담 수준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귀순 유도 공작을 했다고 하며 사죄문 작정까지 요구했던 것이다. 이 사죄문 또한 자율적인 것이 아닌 초안을 주고 베끼도록 지시를 했다. 금강산 관광 1년 만에 있었던 일로 다행히 민영미 씨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로부터 9년 후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피격사건 이후 남북 관계
2008년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이 중단되었다. 2008년부터는 개성공단의 투자가 전면 금지, 현재 인원 전원 철수시키고 사실상의 개성공단 폐쇄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고 2년 후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2010년 5.24 대북 경제 제재조치를 이명박 정부가 내렸다. 이후 북한은 금강산에 있는 남측 시설을 모두 철거했다.  



해금강 호텔 모습
해금강 호텔 모습
북한내 골프장 리조트 모습
북한내 골프장 리조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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