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3,54회]
오늘의 탐사지: 경북 영주 삼판서 고택, 문천서당
주제: 정도전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최수종
경북 영주시 가흥동
정도전 생가로 추정되는 고택
세 명의 판서가 연이어 살아 붙여진 이름
1961년 대홍수로 유실된 삼판서 고택을 2012년에 복원 (원래는 다른 곳에 위치했던 것을 이전)
첫 판서 정운경 정판서 (정도전의 아버지),정운경을 비롯 황유정, 김담까지 3대를 이어온 세 판서의 집
정도전이 유배에서 풀려날 때마다 심신을 달래기도 했던 곳이다.
정도전은 누구인가?
정도전은 지방행정관리직인 향리 집안 출신의 평범한 가문이었다. 정도전의 외증조 할머니는 노비였다. 그래서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 논란으로 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승부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그렇게 정도전은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 급제 후 중앙에 진출을 하게 된다.
정도전이 19세 때 정몽주는 3년 연속 장원 급제로 모든 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정도전이었다. 그때 정몽주는 대학,중용 같은 유교 경전에 심취해 있었고 이를 따라 정도전도 유학을 공부를 했다. 또한 정몽주의 영향을 받아 시묘살이도 했을 만큼 정몽주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벗이었다.
문천서당터가 정도전이 시묘살이를 했던 터이다.
봉화정씨추원제단비
모현사경북 영주의 모현사(慕賢祠)
정도전 및 그의 가족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정도전의 부모님이 나란히 잠들어 계신 묘소
문천서당 인근
정도전의 시묘살이 3년동안 정몽주와 정도전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둘 사이는 더욱 단단해져 가는데 어느 날 포은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새로운 사상 책을 한 권 보낸다. 그 책이 바로 <맹자> 였다.
맹자에서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자가 천자(황제)가 되고 황제의 마음을 얻는 자는 제후(왕)가 되고 왕의 마음을 얻는 자는 대신. 관리가 된다고 했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반장도 채 읽지 못했다. 한 구절 한 구절 몇 번이고 곱씹었고 그의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책이 <맹자> 였다.
맹자의 내용 중 살인자와 정치를 잘 못해 백성을 죽인 정치가는 같다. 무능한 정치가는 학살자와 다름이 없다. 인과 의가 없는 임금을 내몰은 것은 역모가 아니고 인과 의가 없는 왕은 사내일 뿐이니 한 사내를 처단한 것일 뿐이라는 역성혁명에 대한 정도전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공민왕의 죽음
정도전의 시묘살이가 끝나고 이후 공민왕이 내시들에게 시해를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공민왕이 죽은 후 그의 어린 아들(당시 10세) 우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당시의 실세는 권문 세족의 이인임이였다.
당시 이인임은 공민왕의 죽음으로 당시 사대관계를 맺은 명나라로부터 문책당할 것을 염려했는데 이에 공민왕의 친명정책에서 친원정책으로 선회를 한다. 이에 원나라의 반응은 공민왕이 원나라를 배신하고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기에 공민왕의 시해가 정당하다,역모가 아니라고 공표를 하고 우왕의 책봉을 승인한다. 이런 원나라의 입장은 이인임이 절실히 원했던 것이고 왕의 칙서를 가지고 원나라 사신이 오는데 정몽주, 정도전은 이에 크게 반발을 한다.
정도전의 유배
공민왕의 시해를 정당화한 원나라와 화친을 맺으려는 이인임의 계획을 반대하며 공민왕의 친명정책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이인임의 눈에 거슬린 정도전을 직접 원나라 사신 접대를 명령하지만 원나라 사신의 머리를 베어오거나 명나라로 압송하겠다며 거센 반발을 한다. 이에 분노한 이인임은 정도전을 전라도로 유배를 보낸다.
이에 정몽주는 대신들 10여 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가 마찬가지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밭 가는 농부와 대화를 하다가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다.
농부가 유배지에 온 이유를 물으며 적군 보고 도망친 군인도 아니고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면 자기 힘을 알지 못하고 입만 살아서 그런 거로군 이라고 말하는
시골 농부의 말에 자신이 겸손치 못함에 대한 큰 깨달음과 함께 백성들은 가르쳐야 하는 우매한 자들이 아닌 세상의 중심이 되는 민본이라는 말이 바로 백성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책 속의 내용들을 현실에서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혁명의 큰 그림이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둘 채워져 가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유배를 간 다른 신진사대부들은 정계로 돌아가는 것과 달리 당시 실세였던 이인임의 눈 밖에 난 정도전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생활을 9년을 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정도전의 새로운 신세계에 대한 정치,경제,제도,법률,병법등의 설계를 시작한다. 정도전의 위기가 조선이라는 신세계의 밑바탕이 된다.
신흥무인세력의 등장
그가 꿈꾼 혁명을 실현 시키기 위해선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바로 신흥무인세력으로 당시 고려는 북쪽에선 홍건적이 침입하고 남쪽으로는 왜의 침략이 계속되던 시기였고 잦은 전쟁으로 신흥무인세력이 확장되면서 이들 세력의 핵심인물이 바로 최영과 이성계 장군이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의 왕으로 이성계를 선택한다.
정도전이 고려의 충신이던 최영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정도전이 42세 때 최영은 이미 68세였다. 함께 혁명을 꿈꾸기에는 너무 컸던 최영이고 반면 이성계는 나이 49살에 같은 시대를 걸어왔던 두 사람이었다. 정도전은 이미 정몽주를 통해 이성계에 대해 들었었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왜구와의 전쟁을 함께 했던 전우였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추천으로 10년 만에 다시 관직에 오른다. 친명파인 정도전의 관직 복귀가 탐탁지 않았지만 고려 조정은 커져 버린 명과 원나라의 눈치를 같이 봐야 했던 상황이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생일에 축하사절단을 요구했는데 모두가 꺼리는 와중에 고려 조정은 친명파인 정몽주,정도전을 명으로 파견한다. 주원장의 생일에 맞추기 위해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 겨우 도착한 두 사람에 감동받은 주원장은 유배 갔던 고려 사신들을 모두 석방 시켜준다. 그렇게 정도전은 정계에서 다시 지지 기반을 쌓아 나간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에 의해 최영 장군이 죽고 조민수와 이색이 고려 33대 왕 창왕을 옹립하지만 창왕이 신돈의 자식일 거라는 정통성을 문제 삼아 창왕을 폐위 시킨 후 이성계의 인척인 왕요를 왕으로 추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도전과 이성계가 완전히 실권을 잡게 된다.
이때 까지도 정몽주와 정도전은 함께였으나 윤이 이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가 자신의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자 정몽주가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와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던 정도전은 귀양을 가게 되고 이성계는 낙마로 중태에 빠지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이때 이성계의 자식 중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은 (훗날 태종) 이성계를 가마에 억지로 태워 개경으로 데려와 정몽주 파의 위협을 막는다.
그 후 이방원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 정몽죽의 죽음으로 사실상 반대파 세력은 와해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은 이방원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와 정도전의 경계의 대상도 이방원이 됐다.
정도전의 조선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은 왕이 중요하지 않고 체계가 더 중요한 나라였다. 왕의 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매일 밤 잠들기 전 왕에게 상소문을 읽게 하는 등 왕권을 견제하며 재상 중심의 체계를 설계한 정도전이었다. 벗에 가까웠던 이성계와는 마찰이 없었으나 이방원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는 실제로 왕권 강화가 중요시되던 시대였으므로 정도전의 조선은 당시에는 앞서 나갔던 체제였다.
정도전의 최후
조선 개국 일등 공신은 정도전이다. 조선의 틀을 잡으며 조선 건국 후 6년 간 큰 공을 세웠는데 그러던 어느 날 8월 26일 동료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정도전이 있던 집에 불이 나고 정도전은 일단 급하게 근처의 아는 사람 민부의 집에 피신을 했는데 이 민부가 이방원에게 얘기를 하며 정도전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태조 실록 기록에 쓰인 정도전의 최후는
이성계가 죽고 이방원이 실권을 잡은 뒤 쓰인 <태조실록>이고 정도전의 사건은 조정 내에서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말이 진실처럼 쓰여졌을 것인데 정도전의 최후를 본 것은 이방원 측근의 입장으로 쓰였을 태조 실록이다.
정도전에 대한 평가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이고 그 이후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을 또 죽이는데 이방원이 왕에 오른 이후 조선 건국 일등 공신 정도전은 간신으로 평가 절하되고 가문도 풍비박산이 난다. 급기야 훗날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름조차 사라진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포은 정몽주는 충신 정몽주로 불리기 된다. 조선은 충,의리를 강조하는 유교의 나라로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충신 중의 충신으로 평가를 하며 그를 추켜주었고 정몽주에게는 사적인 감정은 없었는데 대의를 위해 정몽주를 죽인 것이나 조선 건국 후 6년 동안 정도전과 이방원은 엄청난 미움과 증오가 싸여 있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를 충신으로 정도전은 간신으로 조선 왕조 내내 교육을 시킨다.
정도전은 조선을 건국하고 디자인 했음에도 대대손손 간신으로 기록되고 평가 절하되고 정몽주는 조선을 반대 했던 사람인데 조선의 충신의 아이콘이 되어 대대손손 자손들이 은덕을 입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그 후 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정도전을 복권 시키고 470년 만에 개국 공신으로 명예 회복을 하게 된다.
1부 끝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 관련 내용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과정 (2부)
☞ 영천 임고서원 속 정몽주 최후와 선죽교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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