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시위 현 사태 속 미얀마의 수장인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해 알아본다.
아웅산 수 치는 누구인가?
미얀마는 이름에 성이 없다. 그래서 아웅산 수치 전체가 이름이다. 1945년 그녀는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아웅 산 장군은 1915년~1947년 미얀마의 군대를 처음 창설하고 미얀마가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웠던 영웅으로 미얀마 국민에게는 아버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아웅산 장군은 1947년 독립을 눈앞에 두고 그의 정적들에 의해 총살을 당한다.
그런 아웅 산 장군의 셋째 딸이 아웅 산 수 치 이다. 아웅산 수치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다가 영국 학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며 평범한 전업 주부로 살아온다. 1988년 어머니의 투병 소식에 미얀마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가 떠나 있던 미얀마 상황은 미얀마(버마)식 사회주의(마르크스식 사회주의 + 불교도 정신)가 되면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경제 전 분야를 군부가 국유화해버렸다.
그녀와 돌아왔을 때는 일명 8888 항쟁의 대규모 민주화 항쟁(1988년 8월 8일)이 벌어졌던 상황으로 이런 군부의 독재에 경제가 파탄이 나자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3000명 이상의 시민이 희생된다. 시기가 맞아떨어져 아웅산 장군의 혈육으로 그녀를 신격화하게 되고 43세에 민족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1988년 8월 26일 50만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한 후 국민 민주연맹인 NLD를 창설하고 의장이 된다. 그 후 미얀마의 희망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1989년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 처분에 처해진다. 1990년 총선에서 그녀가 이끄는 NLD 당이 압승을 거뒀지만 군사 정부는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NLD 당원 수백 명을 가택연금시킨 것이다.
1989년 7월~1995년 7월
2000년 9월~2002년 5월
2003년 3월~2010년 11월
이후 군부는 수차례 그녀를 가택연금시킨다. 21년 중 15년을 가택에 갇혀 지내게 된다. 시민들의 큰 성원을 받은 아웅 산 수 치의 정치 활동이 두려웠던 군부는 그녀를 가택 연금시킨다.
1991년 가택 연금 중 국제사회는 아웅산 수 치의 민주화 공로를 인정해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
이후에 남편 에어리스가 암투병으로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아 아웅산 수치를 만나기 위해 미얀마 입국을 원했지만 미얀마 군부에서 이를 거부하고 대신 아웅산 수치가 영국을 떠나는 것은 허락했으나 다시 들어오지 못할 것을 염려했던 아웅산 수치는 결국 국내에 머물면서 남편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2010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군부는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지시킨다. 이후 2012, 2015년 NLD 당이 승리를 하지만 외국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으로 국가 고문 자리에 앉는다.
아웅산 수치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면서 내세운 공약은 미얀마 정치 사범 해방과 민족 분쟁의 종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가택연금에 처해 있던 아웅산 수 치는 정치 실무 경험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려 정치인으로는 독이 되었던 것이다.
로힝야 대학살에 침묵한 아웅산 수치
아웅산 수치의 두 가지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로힝야족 대학살이 발생하면서 그녀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한다.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이다. 대부분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로힝야족은 무슬림으로 군부는 2017년~2019년까지 로힝야족의 정착지를 파괴, 살인, 성폭행,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지르며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다. 결국 이들은 주변국인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는 이런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인권탄압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열린 로힝야 집단 학살 재판에서 군부를 변호하기까지 한다.
현재 미얀마군의 전신은 영국 식민지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무장독립단체이다. '30인의 동지'라는 독립운동단체에는 현재 미얀마의 독재자 두 명도 포함되어 있다.
아웅 산 수지가 군부를 대변한 이유는
미얀마는 153개의 소수 민족이 있고 이들의 분쟁은 군부의 힘을 더 키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소수민족들은 각자의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복잡한 상황을 이용해 미얀마 군부는 기득권을 유지해왔고 아웅산 수치는 기득권을 해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방식을 쫓아 집권 여당을 비판한 언론자를 조사, 언론인 수감, 로힝야족 거주지인 라킨 주에 언론사 접근도 금지시킨다.
공공의 적으로 세뇌된 로힝야족이였기에 국내에서는 반응이 좋았다. 미얀마에 팽배했던 로힝야족에 대한 반감과 군부의 영향력을 의식해 로힝야족 학살을 변호한 아웅산 수지였다. 이로 인해 국제 사회의 비판이 쏟아지며 노벨평화상 취소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 비판 여론을 틈타 이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였다.
평화상 박탈당한 아웅산 수치
미얀마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불교 신자 버마족 표심이 중요한 아웅산 수치였기 때문에 이 같은 이중적인 행보를 했던 그녀를 국제사회는 앰네스티 양심상 박탈, 광주인권상 박탈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지만 인권 탄압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2015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또한 국정 운영 역량의 부재로 군부와 소통할 정치력이 떨어지면서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불러오게 됐지만 미얀마 민심은 아직도 그녀를 신뢰하고 있다. 2020년 국민 신뢰도 조사에서 국민의 79%가 그녀를 아직 신뢰한다고 답했다.
[출처: 이슈 픽 선생님 37회, YTN와즈 맨]
미얀마 쿠데타 이유와 미얀마 사태 상황 속 국제사회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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