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문종은 누구인가?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었던 문종은 기록도 별로 없고 드라마 속 문종(조선 5대왕)은 항상 병약한 왕으로 나오지만 세종은 적장자 문종(세종 6년), 문종의 아들 단종(조선6대왕)을 일찌감치 세종 30년에 왕세손을 책봉을 한다. 왕세자-왕세손으로 왕위 계승되게 한 사례는 조선건국 이후로 최초이며 문종의 정통성은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왕이고 왕세자 수업만 약 29년을 했던 준비된 왕이었고 조선의 적장자 왕위계승 원칙이 5대 만에 실현된 조선 왕실의 상징적인 왕이었다.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의 죽음
문종은 재위 기간 중 유일하게 왕비가 없었던 왕이다. 왕으로 재임시절에 왕비가 없었다. 1441년 7월 23일 (음력) 세종과 당시 세자 문종을 기쁘게 한 단종이 탄생한다. 그러나 원손이 태어난지 하루만에 세자빈 권씨가 사망한다. (1441년 7월 24일)
세종은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이지만 유일하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후계 문제였다. 세종의 뜻과는 달리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손자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왕비가 살아서 단종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면 1453년 세조의 계유정난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현덕왕후의 죽음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날일 수 있다.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위기를 불러온 죽음인 것이다.
문종이 왕비를 두지 않은 이유
문종은 현덕왕후 이후에 왕비를 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동생 광평대균 (1444년 사망), 평원대군(1445년 사망) 이 연이어 죽고 어머니 소헌왕후(1446년 사망), 아버지 세종(1450년 사망)이 연이어 돌아가시면서 문종은 새 왕비를 맞아들일 틈이 없었다.
문종이 아들(단종)을 늦게 얻은 이유
문종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 28살에 단종을 얻었다. 세종대왕이 문종의 왕비를 2번이나 폐출시켜 문종은 3번 혼인하게 된다.
- 14살때-> 휘빈 김씨 폐출
- 16살->순빈 봉씨 폐출
- 23세->현덕왕후 권씨
첫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세종이 골라준 인물이었으나 문종은 효동, 덕금이라는 여자를 좋아했고 휘빈 김씨가 이를 질투해 주술을 쓰다가 (상대 여자가 신던 신을 태워 술에 타서 남자에게 먹인다) 세종에게 들켜 퇴출된다. 세종은 세자빈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왕비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일찌감치 폐출시킨다.
두번째 순빈 봉씨는 외모도 고려해 선발된 세자빈이었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술을 자주 마시고 취해서 궁녀를 구타,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유교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세자빈의 외로운 마음을 자신의 나인과 나눴고 이로 인한 동성애 문제로 퇴출하게 된다.
세번째 왕비는 후궁 중에서 검증된 인물, 권씨를 세자빈으로 뽑았으나 현덕왕후 권씨는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단종을 낳고 다음날 사망하게 된 것이다.
세종의 선위
문종은 조선 최초의 세자섭정을 한 인물이다. 세종은 자신을 대신에 문종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1442년 세종실록)
* 섭정/대리청정이란? 국왕을 대리해서 국가의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
세종은 문종을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 준비된 왕으로 만들었다. 그 중에 하나는 경복궁에 자선당을 만들어 세자를 거처하게 했고 첨사원을 만들어 (세자의 서무 처리를 위해 설치한 기관) 세자를 위한 비서업무를 하게 했다. 세종이 문종에게 허락한 특권으로 '남면'이 있다. 임금이 정사를 듣는 위치가 항상 남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로 이를 허락했고, 두번째는 '사배'로 임금에게 네 번을 거듭하여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것이었는데 신하들이 문종에게도 사배를 하도록 명령했다.
문종의 업적
섭정 8년, 재위 2년 3개월 동안 실질적으로 국왕의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대리청정 (섭정) 기간 동안 세종의 업적에 큰 역할을 했던 문종이다. 훈민정음 창제, 천체관측, 측우기 발명, 4군 6진 북방정비, 화약무기 개발, 역사서 편찬(고려사,고려사절요 편찬) 등 세종의 업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 문종의 업적이 가려진 부분도 많다. 과학, 국방, 역사에 걸쳐 두루 업적을 남긴 문종이다.
문종의 화차는 1474년에 국조오례서례에 제작 자료가 자세히 나와있다. 설계도에 나와있는 척.촌.푼.리 단위로 나와 있고 가장 작은 단위 리는 0.3m로 아주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설계 복원이 가능했다. 문종의 화차는 임진왜란때도 전국적으로 사용한 기록이 있다.
문종의 사망 원인
1452년 5월 14일(음력) 문종은 사망한다. 재위 2년 3개월 만에 병(종기)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문종의 독살설이 돌았던 것은 문종의 어의 전순의 (문종 때 전의감 의관/ 세조 때 1등 공신으로 오름) 는 별다른 처벌이 없었고 세조때 계국공신으로까지 올랐기 때문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뿐 원인은 잇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유교적 원칙에 따라 상을 치르다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삼년상
유교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의 잘못이라 여겨 문종은 백성들에게 상례의 본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장사를 마친 후에도 부모이 신주를 모시고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렸다. 세종이 겨울에 사망헸기때문에 추운날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고 단식을 했는데 이것을 몇달 동안 한 것이다.
문종은 효가 지극하여 효종이 될 뻔했으나 문으로 뛰어났었다는 뜻의 문종이라는 묘효를 얻게 된다. 조선의 왕들은 광해군, 연산군 빼고 막상 자신의 묘호를 모른다.
**묘효란? 왕이 죽은 다음 그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호칭으로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호
문종의 죽음은 세자(단종) 나이 12살때였다. 개국 60년만에 조선왕조는 권력 공백상태를 맞게 된다. 김종서 VS 수양대군으로 권력이 나뉘게 된다.
**조선에서 적장자로 왕에 오른 사람들은 몇명이 있을까?
계유정난 단종 이야기(황표정사)영월 단종 유배지 (청령포,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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