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러일 전쟁 흐름 (피의 일요일-쓰시마해전-독도편입-포츠머스 강화조약)

by 365 ^^ 2021. 3. 21.

이전글 보기 러일 전쟁 이야기 [벌거벗은 세계사 10회] 

 

[벌거벗은 세계사 11회 러일 전쟁 2부]

 

청일 전쟁에 이어 우리나라는 또 다시 다른 나라의 전쟁터가 된다. 그것은 바로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까지 벌어진 러일전쟁이다. 이 두 나라 전쟁터는 우리나라와 청나라에서 대부분 벌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승기를 잡으면서 대한제국은 비극적인 운명에 봉착하게 되었다. 

 

◈ 뤼순항 전투=여순항 포위전(1904년 2월 8일 ~ 2월 9일)

 

당시 뤼순은 러시아 해군의 기지이자 태평양 진출의 거점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지역이었고 러시아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부동항이으로 러일 양국에 중요한 지점이 뤼순이었다.  

 

청일 전쟁 때 러시아가 뤼순항을 차지하는데 단 하루 걸렸고 그때 러시아는 철벽같은 요새를 만들어놨었다. 뤼순항은  안으로 넓은 만이 있지만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 천혜의 요새항으로 안쪽에 포진한 러시아 함대의 공격으로 항 안으로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뤼순항 뒤쪽의 203고지를 완벽하게 요새화를 시켜놓은 것이다. 침입을 감시할 목적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전부 나무를 깍아 시야를 확보를 했었다.

203고지와 뤼순항 

발트함대를 기다리며 뤼순항에서 버티고 있던 러시아 함대 때문에 일본군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그래서 일본군은 인천으로 들어와 압록강을 건너 육지에서 뤼순을 공격한다. 그러나 노기 마레스케가 이끌던 일본군은 무작정 돌격을 감행하며 그 결과 뤼순 공략전에서 약 6만 명의 일본군이 희생되었다. 전시 사단으로 3개 사단 병력이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러일 전쟁 이후 노기 마레스케를 전쟁영웅으로 만든다.

노기 마레스케

노기 마레스케는 무모한 작전 지시에 책임을 느끼며 자결을 결심하지만 일왕이 자결을 말리고 일왕 사망 하자 다음날 바로 노기 마레스케는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자결한다. 

 

당시 일본의 전쟁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고다마 겐타로의 해안포 공격

노기의 작전이 실패하자 만주총군 총참모장으로 고다마 겐타로를 투입하여 일본 본토 주요 항구에 있던 해안포를 가져와 설치 후 203고지를 공격한다.

고다마 겐타로 

그래서 콘크리트 요새를 모두 부숴서 203고지를 점령하게 된 일본군이었다. 그 후에 203 고지 점령 후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고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하고 1년 뒤인 1905년 1월 뤼순항이 함락 당한다.

일본군 해안포 모습

 

러시아 함대는 공격한 모습

 

'피의 일요일 '사건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시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있던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써 전쟁 지휘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서쪽 출입구 상트페테르부르크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전쟁으로 인해 늘어나는 세금을 국민들이 부담해야 했고 근대화 추진을 진쟁중이던 러시아는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돼서 경제적으로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최대 금속기계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부당해고시키면서 공장전체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다. 당시  러시아 국민은 과도한 토지 상환금, 물가 폭등, 저임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의 내부 균열을 악화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  해 러시아 혁명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그리고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국민들은 황제의 궁으로 향한다. 부당해고의 항의하기 위해 황제의 궁전으로 러시아 국민들이 향한다.

1905년 1월 22일 황제궁으로 행진하는 러시아 국민들

 

궁전 앞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행렬을 막았지만 계속해서 국민의 행진이 다가오니 군인들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고 약 천여 명이 그 자리에서 희생이 된다. 

 

당시 그곳에는 눈이 많이 왔고 하얀 눈위에 핏빛이 너무 선명하게 남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전역에 황제에 대한 배신감과 충격으로 다음날에도 국민과 군대의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어서 모스크바까지 총파업이 시작된다.  1월 한달 동안 파업 참가자 수가 무려 40여만 명에 이른다.

러이사 국민과 군대가 대치한 모습

 

이렇게 러시아는 전쟁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러시아 내부에서는 전쟁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경파의 주도로 전쟁을 이어나간 러시아였다. 

 

봉천(심양)전투 (1905년 2월 20일~3월 10일)

 

이 전투는 일본의 최대 병력이 투입되었다. 일본군 병력이 약 25만 명이었고 러시아군이 약 36만 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가장 규모가 컸던 국제전이었고 이 전투에서도 일본군이 승리하게 된다. 

 

쓰시마 해전 (1905년 5월 27일 ~ 5월 28일)

발트함대 러시아의 자랑 1703년 대북방전쟁 와중 표트르 대제에 의해 창립되어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일본보다 2배이상 많은 공격용 전함을 보유했다.  

 

러시아는 이 발트함대를 출격시키기로 결정하고 빠르게 항해해 전쟁의 격전지까지 와야 하는 상황에 발트함대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왔다.

발트함대 아프리카 항해 루트

그 이유는 발트 함대가 지나는 곳곳이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일 동맹으로 영국은 러시아 함대를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영국의 압력으로 연료 보급이 막힌 발트함대였다.

발트함대

1904년 10월 출발한 발트함대는 약 200일 동안 3만km의 대장정 끝에 1905년 5월에 대한 해협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톡을 향하던 러시아 함대를 일본은 그냥 보내지 않았다. 쓰시마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 해전이 시작된다. 

 

쓰시마 해전의 일본 해군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트함대의 진출로를 가로막은 뒤 선두에 있던 함대부터 집중 포격을 가하면서 지휘부를 상실한 러시아는 약 40시간 만에 발트함대가 완전히 궤멸한다. 이것이 일본이 역사에서 위대한 순간에서 한 장면이라고 꼽는 쓰시마 해전이다. 

 

취도 불법 점령

이때 일본의 사령부는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진해를 불법 점거 후 발트함대를 대비한 사격 연습을 우리 땅에서 했다. 진해 서쪽 작은 섬 취도를 발트 함대로 상정하고 섬을 향해 사격 훈련을 하면서 섬의 약 98%가 소실되어 현재는 약 2%만 남아있다. 일본은 러일전쟁은 조선을 마치 자기들 영토인 것처럼 사용했고 심지어 일본군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며 취도에 기념비를 세웠다.

출처 거제신문 취도 모습

 

현재는 기념비 주위에 돌탑을 쌓아 평화의 탑으로 정비했다.

취도의 평화의탑으로 정비

 

러일 전쟁 결과

러일 전쟁은 청일전쟁과 비교했을 때 엄청난 물량 소비전쟁이었다. 청일 전쟁때 사용했던 7개월 분의 무기 사용량을 러일전쟁 개전 일주일 만에 초과해버렸다. 러일전쟁은 대략 4억 엔가량으로 가능할 것이라 예상했던 일본이었는데 약 1년 7개월 동안 러일 전쟁에서 사용된 비용은 약 20억엔으로 10배게 달했고 13억 엔은 영국과 미국에서 절반을 빌리고 나머지 절반은 국민에게 공채를 발행(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채권을 강제로 판 것)했던 것이다.

러일 전쟁 결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9일)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12일)

 

러일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일본은 영국과 2차 영일 동맹을 맺고 영국은 인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권리가 있음에 동의하였고 또한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이미 상호 승인한 상태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내용

 

 영일 동맹(1905년 8월 12일) 내용

 

이미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로 상호 지배를 승인하고 있던 상황에 고종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앨리스를 극진히 대접했던 고종이었다. 그러나 앨리스가 돌아간 두 달 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미국 공사관이 제일 먼저 철수를 했다.    

 

미국의 루즈밸트 대통령 딸 앨리스 방문이야기 (1905년 9월) 3박 4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한 앨리스 이야기 보기 

 

 

덕수궁 석조전 만들어진 배경과 고종의 외교 활동들

경운경(덕수궁)은 고종이 마지막을 보냈던 궁궐로 경운궁의 특징은 전통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혼재해 있는 궁궐이다. 동쪽에는 전통 건물,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구

jangane.tistory.com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9월 5일)

 

일본 전사자는 약 8만7천 명 , 부상자는 약 38만 명 으로 일본도 장기화된 전쟁에 기진맥진해지면서 러시아와 일본 측 대표가 미국 동부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모인다. 이렇게 치열했던 러일 전쟁에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면서 1905년 9월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을 종결하며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한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

 

그러나 조항에 대한 의견 차이로 신경전을 이어갔던 러시아와 일본은  약 1개월간의 협상 끝에 최종적으로 강화를 체결한다. 결국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며 조선에 대한 정치,군사,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조선에 대한 필요 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취를 할수 있는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한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내용

당시 우리나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상황이었다. 

 

어쨋든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강국 러시아를 꺾고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독도 편입

일본은 러일전쟁 중 군사 요충지로 활용하려고 우리나라 영토 일부인  독도를  강제로 편입한다.  이때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겠다는 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칭하며 시마네현으로 강제편입을 했고 곧이어 명문화한 시마네현 고시를 발표했다.  그 후에 독도에 군사적 목적으로 망루까지 설치 울릉도 독도 마쓰에를 잇는 해저 군용 통신선을 설치한다.

 

을사늑약(1905년)

한반도 식민지화의 시작점인 독도가 강탈된 후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로인해 외교권을 상실하게 된다. 

 

외교권 상실의 의미

자주 외교가 불가능하면 가국 공사관들이 철수하게 되고  대한제국과 외교를 위해서는 일본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 버리는 것이었다.  을사늑약은 조선이 망했다는 것을 일반사람들도 느끼게 했던 비통한 사건이었다. 

 

을사오적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았은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매국노들이다.

을사오적

 

 

을사늑약(=을사조약) 뜻, 을사늑약이 무효인 이유

일본은 임진왜란(1592년)때부터 한반도를 지속적인 침략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1875년 운오효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1905년 마침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겠다는 을사늑

jangane.tistory.com

 

헤이그 특사 파견

 

을사늑약 후 일본은 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 하고 일본의 초대 통감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대한제국이 주권 국가임을 알리는 임무를 가지고 비밀리에 파견되지만 일본의 방해로 인해 회장 참석에 실패했지만 헤이그 특사들은 장외 투쟁을 통해 불합리함을 알리려 노력했다. 

 

 

헤이그 특사 이야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5년 11월 을사오적의 주도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니 고종은 일본의 불법 점령에 대한 부당함을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 헤이그 특사 파견의 정보를 준 것이 러

jangane.tistory.com

 

고종의 강제퇴위

그 이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계기로 고종은 강제 퇴위 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며 강제 병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 이후 혁명의 바람이 계속되어 10월 선언으로 시작으로 마지막 왕조가 붕괴되고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한제국에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러시아 10월 선언

 

1909년 기유각서을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 박탈 

년 한일약정각서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 박탈

 

러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불과 1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