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17회 후반]
노덕술 그는 누구인가?
친일 경찰 노덕술 최악 중의 악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당시 노덕술의 별명은 고문 귀신으로 일본 경찰 보다 훨씬 더 악랄해서 부쳐진 별명이다.
노덕술의 고문은 악랄하기로 유명했는데 죽기 직전까지 때리기, 코에 고춧불 붓기, 비행기 태우기(뒷짐 결박 후 공중에 달아 매는 고문)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문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면서 고문을 했다. 좁은 상사에 가둬두고 밖에서 못을 박거나, 피해자의 혀를 잡아빼는 고문,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뽑는 고문, 손발을 묶어놓고 매달아 놓은 후 구타하거나 물 먹이는 고문등 수많은 고문을 만들어냈던 노덕술이었다.
노덕술은 어떻게 친일 경찰이 되었나?
어렸을 때 노덕술은 일본인 어부 밑에서 일을 하거나 일본인에서 일을 하는 등 십대 시절을 막노동 판에서 가난하고 힘든 컸다. 그러던 어느날 가난해서 벗어나기 위해서 1918년 순사 교습소에 지원해서 1920년 일제 순사로 임관한다. 이렇게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1920년 경찰이 되자마자 1년만에 순사부장이 될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지금으로 치면 말단 계급에서 바로 파출소장이 된 것이다. 친일로 성공하려 애썼던 노덕술은 1세대 엘리트형 친일 경찰 김태석과는 전혀 다른 2세대 자수성가형 친일 경찰이었다.
경력을 쌓고 있던 노덕술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부산 통영에서 순사 부장으로 근무하던 노덕술은 1929년 광주학생 항일 운동이 부산의 동래 고등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때 이곳이 노덕술의 관할 구역이었다. 노덕술은 만세 운동을 하던 어린 학생들을 다 잡아들여 학생들을 악랄하게 고문하면서 친일 경찰로 유명해지게 된다.
보안과장으로 초고속 승진
이 일로 일본에게 인정 받아 평안남도 보안 과장이 된다. 독립군들이 만주나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오기 위해 꼭 고쳐 가야 하는 곳이 평안남도의 신의주와 평양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노덕술이 보안과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출세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 활동
이 때문에 노덕술은 실제로 실적을 많이쌓아 고문 경찰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노덕술은 공훈 기록을 본인이 직접 작정했는데 1937~38년 일제의 공훈 기록을 보면 중국어로 군수품 수송 업무를 84 회, 일제 침략 정당화를 위한 선전 활동과 친일 좌담회를 35회 진행, 1년 6개월 의 84 회는 일주일에 한 번은 군수품 운반을 했다는 것이다.
친일 좌담회도 2주에 한번씩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43년 노덕술은 이 공로를 인정 받아 경시로 승진 한다. 1910~일제치하 35년 동안 경시로 진급한 조선인은 총 21명인데 노덕술과 김태석이 그 중에 한명인 것이다.
광복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남하
노덕술의 친일 행위가 정점에 있은 후 2년 뒤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광복 이후에 노덕술은 1945년 당시 소련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도망을 가지 못하고 구금었는데 다행히 풀려났다. 그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노덕술은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오게 된다. 그때는 38선으로 왕래가 자유로웠던 시기에 수월하게 서울로 내려온 노덕술이었다.
노덕술 한국 경찰로 재등용
당시 남한은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자는 분위기였고 당시 수도경찰청장이 노덕술을 수사과장으로 임명한다. 이렇게 다시 경찰이 된 후 노덕술은 다시 고문을 시작하게 된다.
고문 귀신이라는 이름의 걸맞게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고문으로 경찰 수사의 공을 세우고 경찰에에서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일본 경찰에서 한국 경찰로 또 다시 고문을 일삼게 된다. 이것은 친일파를 제대로 처벌 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노덕술 김원봉을 체포
중국 상대에서 조선인민혁명당이라는 독립운동 조직의 김원봉을 노덕술이 고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47년 3월 전국에서 3월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파업에 배우자로 김원봉이 집 지목되면서 노덕술이 김원봉을 잡아들이게 된다. 이때 노덕술은 김원봉을 구타와 고문 모욕적인 처우를 일삼았다. 일제시대 독립을 운동을 했던 사람이 광복 후 일제시대 친일을 했던 사람에게 당하니 얼마나 어쳐구니 없는 일이였을까?
김원봉은 1939년 조선 의용대를 창설해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광복군 제 1지대장 및 부사령관과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을 역임하며 조국 광복에 힘쓴 독립운동가인데 친일 경찰로 승승장구한 노덕술이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였던 김원봉을 고문하니 김원봉이 느꼈을 허망감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그 당시 김원봉은 의열단 동료 유석현 선생을 찾아가 한탄을 했던 말이다.
박성근 시신 유기한 노덕술
그러던 어느날 노덕술이 박성근이라는 용의자를 수사하던 중 고문으로 그를 죽인다. 박성근이 사망하자 노덕술이 연기를 했다. 취조실의 창문을 활짝 열고 ‘저 놈 잡아라’ 소리친다. 박성근이 도망간것 처럼 꾸민 것이다. 1949년 1월 얼어붙은 한강에 시신을 유기하기까지 하면 은폐했던 노덕술이었다.
지명수배 당한 노덕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 달 전에 경찰 내부에서 소문이 돈다. 그래도 친일 경찰이 아닌 사람들이 고위직에 올라야지 친일 경찰이었던 노덕술이 고위직이 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라며 노덕술이 저지른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나게 된다. 이에 노덕술은 수사대에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 수도 경찰청 부청장이 찾아와 노덕술을 데려간다. 그 후에 노덕술이 도망갔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노덕술을 의도적으로 빼돌린 것이다
그러나 노덕술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수도경찰청 안에서 숨어지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른체 전국에 노덕술을 지명 수배했던 것이다.
체포된 노덕술
노덕술이 은신중이던 1948년 10월 정부수립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 특위가 출범하고 민족을 해한 자들을 처벌하고자 결성된 반민특위는 노덕술 체포대를 구성해 노덕술을 체포하게된다. 1년 만에 체포된 노덕술의 악행을 밝혀낼 재판이 열리게 된다.
노덕술은 숨어 있으면서 무려 15명의 반민특위 조사관을 대상으로 다른 친일파 공모자들과 암살을 계획했던 것이다. 38선 쯤에서 죽은 후 월북하려는 것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숨졌다는 거짓 발표까지 계획했던 노덕술이었다. 백민태라는 사람의 자백으로 사건 모의 정황이 들어났는다.
무죄로 풀려난 노덕술
그러나 노덕술은 재판과정에서 박성근 고문치사 사건 증거불충분, 반민 특위 암살 모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노덕술은 풀려난다. 그 후 반민특위는 해체되었고 노덕술의 친일 행적은 모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석방 후 군인이 된 노덕술
석방 이후 경찰로 돌아갈 수 없었던 노덕술이 선택한 직업은 군인이었다. 노덕술이 육군 제1 사단 헌병 대장이 된다. 군인 생활을 하던 중 뇌물 비리 혐의로 다시 구속이 되고 1955년 11월 징역 6개월을 받고 군에서 파면된다.
선거에 출마한 노덕술
이후에 자신의 고향인 울산 장생포로 내려와 생활을 하게 되고 1960년 4.19혁명 이후 이루어진 제 5대 민의원 선거의 출마하게 된 노덕술이 여덟 명의 후보자 중 6등으로 초라하게 낙선을 하게 된다. 그 후에 종적을 감쳐 버린다.
노덕술의 최후는 ?
1965년에 갑자기 노덕술은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 된다. 그 이후에 노덕술은 남은 생을 잘 살다가 1968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도 잘 받고 그렇게 사망 한다. 악명 높은 친일 경찰의 말연은 평범하고 조용했다.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며 이런 아픔이 반복 되지 않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친일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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