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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김태석 친일경찰 이야기

by 365 ^^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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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X마 17회 ]

 

김태석 그는 누구인가? 

1세 대 친일경찰 김태석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악날함은 최고였던 친일 경찰 중에 김태석이 있다. 1920 년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만든 친일파 청산 지침을 만들었는데 '칠가살' 이라고 해서 즉시 차단 해도 되는 유형에 반민족행위자들의 예시로 들만큼 악명 높았던 김태석이다.

 

김태석의 노년기때로 추정되는 사진
칠가살이란 임시정부에서 지정한 마땅히 죽어야 할 7가지 대상으로 즉시 처단해도 되는 7가지 유형의 반민족 행위자들을 일컫는다.

 

제 1세대 친일 경찰로 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의 친일에 앞장선 경찰이었다. 1890년대에 대한 제국이 운영하던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한 인재로써 일본 유학까지 한 엘리트중에 엘리트였다. 당시 열악했던 조선의 교육환경에서 보기 드물게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고등경찰 임명

유학 2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김태석은 1910년 조선의 판세를 보더니 1912년 일본 경찰의 통역관으로 취직을 한다. 김태석의 경찰 경력은 통역관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조선인을 신문하던 일제의 통역을 돕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친일은 1910년대 항일 비밀결사단체 사건 수사에 관여하여 그 공이 인정되어 1918년 경기도의 고등 경찰로 임명 된다.

 

 

 

 

 

 

 

강우규 의사 체포한 김태석

그가 체포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에 강우규 의사가 있다. 강우규 의사 의거 현장에 김태석이 있었다. 당시 현장 경계를 하는 김태석은 폭탄 던지는 강우규 목격하고 달아난 강우규 의사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김태석은 자진 출두하겠다는 강우규 의사를 강제로 포박해서 경찰서로 강제 연행한다. 이것으로 김태석은 일제에게 인정받아 특진까지 된다.

 

 

 

강우규 의사 (3.1 운동 이후 처음 일으킨 항일 의거)

친일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 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1919년에 강우규 의사가 있다. 의열 투쟁을 벌인 강우규를 잡기 위해 안달난 친일 경찰 김태석이었다. 3.1운동 후 만세 시위운동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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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사를 체포 후 일본 경찰의 체면을 살린 김태석은 밀정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의열단을 잡기 시작한다. 의열단이 일명 ‘밀양 폭탄 사건’을 계획 할 때 관련자들을 체포해 숨겨진 폭탄을 찾아내는데 김태석의 밀정이 한 몫 한 것이다.

 

경시->형사과장

김태석은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한 온갖 악랄한 고문들로 공을 남기고 유명해진다. 그만큼 악명 높았던 악질 경찰 김태석이었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며 쌓아온 공로들로 승승장구하며 경찰로써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위치인 경시(1923년)에 승진한다. 경찰에 발을 드린지 약 10년 만에 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고등 경찰의  꽃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으로 진급한다.

 

행정직 공무원으로 변신

과장은 요즘으로 치면 군수급인데 1923년 경찰 퇴직 후 실제로 이듬해 경기도 일대 군수를 역임하게 된다. 악명 높은 친일 경찰에서 행정직공무원으로 변신한다. 그러다 보니 차츰 경찰 시절에 그의 악행은 잊혀져 갔다. 그러나 김태석의 친일 행적은 경찰 퇴직 이후에도 계속되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조선에 국가총동원법을 선포하게 되고 일본이 전쟁을 돕기 위해 만든 회사가 조선 광업 진흥 주식회사인데 여기서 감사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의 지하자원을 전쟁의 사용 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 공덕이 인정 되어 조선총독의 자문기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 된다. 친일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최고의 명예직까지 획득한 것이다.

 

광복 후 김태석의 행보

해방 직후  친일 경찰의 8할 정도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도주 한다. 그러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만들어지고 통과된 후 집행을 위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자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한 김태석이다.  그러나 김태석은 밀고에 의해 적발된다. 1949년에 반민특위 수사관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후 석방된 김태석

이때 김태석은 얼굴에 웃음을 띄며 혈기왕성하게 재판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민족을 위해서 했다고 자신을 합리화 하는 모든 친일파들의 논리를 그대로 읊었다. 당시 김태석은 강우규 의사 체포또한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 진술을 하면서 거짓말로 진술을 일관했고 그때 검찰관은 이례적으로 그에계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몇일 뒤 재판관의 판결은 무기징역과 50만원의 재산 몰수금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몇달 뒤 1950년 봄 6.25 전쟁 직전에 김태석을 풀려난다.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 대다수가 이렇게 풀려났다.

 

김태석의 최후 

김태석의 최후는 아무도 모른다. 6.25 전쟁 중 종적을 감춘다.  늦었지만 친일인명사전에 김태석 이름이 박제되어 배신자로 영원히 기억되어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남겼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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