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 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1919년에 강우규 의사가 있다. 의열 투쟁을 벌인 강우규를 잡기 위해 안달난 친일 경찰 김태석이었다.
3.1운동 후 만세 시위운동이 계속 되던 1919년에 강우규는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을 만들어 활동했던 사람으로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로 망명해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을 모색했고 공동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과 독립 정신을 이어가던 강우규 의사였다.
조선 총독이 교체된다는 소식을 들은 강우규 의사는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을 처단 하기로 결심 한다. 그리고 총독은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오늘날 서울역)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시 사이토 마코토를 총독이 부임 행사로 일본 군경이 촘촘하게 깔린 역 주변에 유독 경계가 삼엄했던 이유는 3.1운동은 5월까지 계속되어 9월에 온 총독의 안전이 동림 운동 의 열기가 남아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 하는 듯하다.
그 경계를 뚫고 강우규 의사는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강우규 의사는 두루마기 속에 폭탄을 감춰서 잠입에 성공한다. 당시 평균 수명 약 42세로 나이가 많은 축에 속 했던 환갑을 넘은 강우규는 경계가 소홀할 수밖에 없어 의심 없이 군중 속에 숨어있을 수 있었다. 잠입후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순간 폭탄을 던졌으나 사이토 마코토의 허리띠에 폭탄 파편이 박혔을 뿐 총독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성 특파원, 일경 등 2명이 죽고 37명이 부상을 당한다. 3.1 운동 이후 처음 일어난 65 세 강우규 항일의거였다.
15일 후 불심검문에 의해 결국 김태석은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다. 그후 강우규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강우규 의사 수형 기록 카드
“단기 4253년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의 순국일로 3.1운동이 일어나고 1년여 만에 끔찍한 고통 속 수감 생활을 버티다 사형으로 순국하셨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반민특위 및 친일파 청산 하지 못한 이유, 처단된 친일파는 몇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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