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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사태 (원인/ 금모으기 운동 )

by 365 ^^ 202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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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란?

IMF 외환위기는 (International Monetary Fund)로 국가들이 갑자기 돈이 필요할때 돈을 빌려주기 위해 설립한 기관으로 각 국가마다 출자해서 마련한 자금한다. 미국, 유럽 등 물론 우리나라도 출자를 했다. (한마디로 달러를 빌려주는 글로벌 대부업자)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에 보유하고 있는 자산대비 값아야 할 자금이 너무 많은 상태로 부족한 외환을 IMF(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사건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1997년 구제금융을 최초로 받은것은 아니다. 이미 1965~1987년 십여 차례 요청하고 잘 빌려쓰고 잘 갚았다.

 

90년대 호황 시기

80년대는 3저 호황으로 저금리, 저임금, 저유가 호황을 이끌었고 산업전반에 걸쳐 수출이 호조를 보였고 일손도 크게 모자라 중소기업들은 인력난을 겪기도 했다. 90년대까지 호황은 이어져 철강생산 세계 1위, 조선산업 세계 2위였다. 

 

 

 

 

IMF 사태 원인 및 진행과정

 

외환위기의 원인 

1996년 무리한 OECD가입 

부자국가들이 가입하는 OECD 가입으로 자유로운 금융거래를 요구 자본, 금융시장 개방요구했고 그래서 국가가 내놓은 절충안이 장기외채는 국가가 감시하지만 단기외채는 기업 마음대로 하도록했더니 단기 외채를 돌려막기 시작한 기업들이었다. 이것이 외환위기의 시발점이다.

 

준비 없이 급속히 출시된 세계화로 인해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이 초래한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96년 OECD가입에 관심이 쏠려 삼페인을 일찍 터트린 것이다. 선진국으로 향하는 기쁨에 취해 위기의 그림자를 알지 못했다.

 

외환보유액의 탕진 

금융 자율화가 진행되면서 기업의 은행 대출이 쉬워졌고 무분별한 외채 사용으로 외환보유액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안정된 시장을 원하는 외국 투자자들은 아시아 경제 위기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금융권들이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투자자들이 회수하는 달러를 외환보유액으로 갚고 있었다.

 

반도체 가격 폭락 경상수지 적자

1996년 반도체 가격의 폭락으로 외화벌이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외환보유액이 말라버렸다. 경제 구조가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접어들기 시작하다가 1996년 경상 수지 적자 273억 달러를 기록한다.

 

 당시 경제가 안좋다는 말은 있었다. 은행들은 금리가 싼 선진국에서 단기로 빌린 돈으로 고금리인 동남아에 장기로 투자를 하고 있었다.  호황을 누리던 동남아 경제가 침체를 겪었고 몇년째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하며 외환보유액 급감

 

1997년 한보그룹 부도

그렇게 1년이 흘러 1997년 1월에 한보사태가 터진다.  잘나가던 대기업 한보그룹이 부도를 맞이한다. 약 5조 7천억 원의 거액의 대출금으로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한 결과였다. 한보사태는 Imf 의 신호탄을 날린 사건이었다. 한보그룹은 1970~80년 대치동 은마 아파트 건설 사업에 성공하면서 건설쪽에서 지속적으로 호황을 이루던 회사였다. 당시 재계 순위 14위였다.  금융계와의 유착과 부정 비리가 낳은 사태였다.

 

 

1997년 3월 삼미그룹 부도

한보그룹의 부도를 수사하던 과정에서 나비효과처럼 1997년 3월 삼미그룹이 부도로 도미노 효과처럼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반기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연이은 부도가 한국 경제의 위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97년 4월 진로그룹 부도

1997년 5월 삼립 식품,대농그룹 부도

1997년 6월 한신공영 부도

 

 

1997년 7월 기아자동차 부도

그리고 1997년 결정타 기아 자동차 부도 사태가 터지면서 한국경제는 가망성이 없다는 진단이 나오게 된다. 은행이 기아에 빌려준 금액은 9조 4천700억원이었다.  

 

 

 

대기업들이 연쇄부도는 그 여파가 금융권까지 이어졌다. 1998년 9월까지 파산한 기업들이 은행의 남긴 빛은 20조 5 천억원에 달했다. 연이은 부도로 금융권은 곧바로 기업들에게 자금 회수를 시작했고 7월부터 태국 바트화 폭락 8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폭락, 필리핀, 말레이시아, 타이완, 홍콩순으로 폭락하자 발 빠른 외국인들은 보유한 주식을 모두 매도하기 시작했다. 

 

외국은행들은 만기가 돌아온 한국은행들 채권에 대해 기존 관행과 달리 만기 연장을 거부하며 빚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달러로 빚을 갚아야했고 환율이 급등, 원화가치는 폭락 등 동아시아 경제위기

 

97년 10월 쌍방울 그룹 부도,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한국 종합주가지수 500선 붕괴,

97년 11월 1일 해태 그룹 부도 

97년 11월 4일 뉴코아 그룹 (재계순위 25위) 부도

97년 11월 10일 원화 환율 달러당 1000원 돌파 

 

 

97년 11월 21일 IMF 구제 금융 신청 

이로 인해 외환부족 사태는 날로 심각해져서 급기야 한국경제의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1997년 11월 21일 마침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문제는 외화를 빌리게 되면 국내 경제 시장이 개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이것은 또 다른 위기의 시작이었다. 구제금융 요청 후 우리나라는 폐업, 해고 구조조정 등 사회는 혹독한 시련으로 뒤덮이게 됐다. 

 

97년 11월 25일 S&P 사 ,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97년 11월 26일 국내 최대 해외여행사 온누리여행사 부도

 

 

IMF 협상의 주 내용은? 

구제금융을 빌려주는 대신에 imf 에서는 몇 가지 협상 조건을 제시한다.  조건을 협상하며 구제금융 지원이 약 한달간 지체되었다. 

 

▷외국인의 활발한 투자를 위해 원화 가치를 떨어뜨려라 

▷투명한 기업 경영을 위해 기업 구조를 개편해라.  

▷고용과 해고 제도를 유연하게 개편해라. 

 그래서 IMF부터 비정규직이라는 경제적 화두가 사실상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다. 

 

이것이 우리 경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 IMF 협상 내용이다. 

 

 

국가 경제정책 대폭 수정 요구, 두 번째는 구조조정을 통한 고용정책을 수정 이것은 평생직장의 개념을 없애는 등 노동시장의 변화등을 요구했다.  

 

IMF 요구사항은 망하는 기업을 국가가 도와주지 말고 기업도 개인도 완전 경쟁 체제로 능력에 따라 살아남게 하라는 내용 

 

1997년 12월 3일 IMF 가 요구한 조건을 수용하며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에 서명한다. 그래고 IMF는 한국에 555억 달러 지원을 확정한다. 

 

97년 12월 05일 고려증권 부도

97년 12월 06일 한라 그룹부도, 대우그룹의 쌍용자동차 인수

97년 12월 12일 증권업계 4위 동서증권부도 

 

 

대통령 후보에게 각서받은 IMF

IMF 구제금융 자금을 신청하고 1달 동안은 이대로 국가가 망한다는 기사가 계속적으로 나왔다. 한국 경제는 전혀 진정될 기미가 없는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8년 12월 18일 15대 대선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유력한 3당의 후보들에게 각서를 받아갔던 IMF였다.  이것은 차기 정부에서도 IMF 와의 합의 내용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서약서 였다. 

 

그리고 그후 IMF 와 선진국의 조기 자금 지원 발표가 있었다. 1998년 12월 말까지 국가부도를 막을 백억달러 조기 지원을 발표한다. 선진국 채권 은행들은 한국의 외채를 만기 연장해 주면서 당장의 급한 불을 끈 한국이었다.

 

 

IMF 이후 여파

하지만 한국 경제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IMF는 지원 조건으로 고금리 정책을 강요했다.  고금리 정책은 은행은 부자가 되고 부채를 가진 사람은 점점 가난해지는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는 것이다. 또한 강도높은 기업의 구조조정을 요구했는데 가장 강하게 요구했던 기업은 금융회사였다.

 

97년 12월 23일 달러당 1995원 
조흥, 한일,상업, 제일, 서울은행 주요 5개 은행이 사라졌다.

 

주요 5개 은행이 해외 자본에 팔리거나 통폐합으로 은행들은 사라져 버렸다. 정확하게 국내 은행 26개 중 16개의 은행이 퇴출되었다. 또한 30개 재벌 기업 중 17개가 사라졌다. 1998년 1월 매일 하루에 100개 이상 기업 도산했다. 

 

당시 재계 서열 24위 과자로 유명한 해태그룹, 인기 백화점이었던 미도파, 결정적인 것은 재계 서열 3위 대우 그룹도 부도 IMF 위기 여파로 7 만개 정도의 많은 기업들이 도산을 했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기업들은 구조 조정을 통해 많은 직원들을 해고했고 이로 인해 실업자수는 130만명 이상의 고실업 국가로 접어들었고 자살률은 전년 대비 42% 증가했다.

 

인기백화점 미도파 역시 부도

 

98년 02월 25일 제 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나라 경제를 살리고자 했고 국민들의 금은 기업들의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 

 

 

 

금모으기 운동 

1998년 금모으기 운동의 시작은 새마을 부녀회장 애국 금가락지 모으기 운동 으로 시작되었다. 작은 아기 돌반지 모으기로 시작해 전국민이 참여하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 집에 있는 금이란 금은 다 들고 나왔던 국민들이었다.  1998년에만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2달만에 약 351만 명이 참여하여 금의 무게는 약 227톤 그 당시 돈으로 약 2조 5천억원이다.

 

제각각의 사연을 품은 금붙이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모였다. 

 

3년간 온 국민이 피나는 노력 끝에 3년 8개월만에  2001년 8월 23일 조기 상환으로 마침내 IMF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성공사례이다. 4년 전 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세 나라 중 유일하게 IMF조기 졸업했고 2002년 A등급의 국가 신용등급을 회복했다.

 

나라가 어려우면 발휘되는 한국인 특유의 애국심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본에 강압적으로 빌린 1300만 원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국민이 자발적으로 벌인 국채보상운동으로 남녀노소, 빈부격차, 신분차이 상관없이 아끼던 패물과 재산을 내어주었다. 국가적 위기의 모든 짐은 국민들이 짊어지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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