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5월 27일까지 광주의 열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벌인 상황 속에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운동, 항쟁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아보기 전 5.18 이전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5.18 직전의 상황
1979년 박정희의 유신시대가 10.26 사태(박정희 암살)로 군부 정치가 종식되는 듯 하였으나 국가 원수가 암살된 혼란한 정국을 틈타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새로이 군권을 장악한다. 이에 전국의 학생들은 신군부에 맞서 전두환의 집권을 막기 위해 시위를 벌인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이런 상황에 비상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고 5월 18일 수많은 광주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광주의 많은 학생이 전남대 앞에 집결해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반대 시위한다. 그러나 이날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위 진압을 하게 된다. 이날 학생들의 수는 최대 1000명 정도로 경찰 인력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무자비한 진압을 하게 된다. 이것은 항쟁으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된다.
*공수부대는 최정예 부대로 적 후방에 침투해서 인명 살상, 시설물 파괴 등을 담당하는 부대를 말한다.
계엄군의 잔혹함.
비상계엄 확대 전 5월 14일 ~16일 경찰의 시위 진압은 유혈 사태 없이 평화로웠으나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형태는 완전히 달랐다. 특수 진압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대검으로 사람을 찌르기도 하고 골목, 상가까지 추격해 시위자들을 연행하고 지나가던 버스를 세워 대학생을 무차별 연행, 집까지 쫓아가서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학생을 진압, 연행하는 과정은 마치 전쟁포로를 끌고 가는 듯 심한 구타와 속옷 차림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
공수부대 투입 첫날 이러한 강경 진압으로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인으로 5월 18일 오후에 귀가하던 중 구타를 당해 다음날 새벽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
충격적인 것은 2월부터 군은 폭동진압 훈련에 집중했다. 휴가도 못 가고 계속되는 폭동 진압 훈련에 힘들어했던 공수부대원들의 스트레스가 시위대로 옮겨가게 훈련시킨 것이다.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있었으나 광주의 시위만 점점 더 폭력 진압이 심해져갔고 5월 18일 첫날부터 광주 공수부대를 추가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5월 19일 새벽 0시 50분
11 공수여단을 광주로 증파하고 아침에는 장갑차, 탱크를 투입하게 된다. 5월 18일의 시위대 규모는 1000명 남짓이었으나 5월 19일 금남로에만 2만 명이 집결했다.
5월 20일 저녁
택시기사들의 차량 시위를 벌인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을 목격하고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위는 광주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시위로 확산되었다.
5월 20일 밤 (첫 번째 집단 발포)
광주시청을 지키던 3 공수여단 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가 된다. 이 과정에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충돌하면서 이때 공수부대는 첫 번째 집단 발포를 한다.
5월 21일 새벽
공수부대 발포 후 광주역 부근에서 처참하게 버려진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19세 허봉과 34세 김재화 이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한 10여 명의 광주시민이 집결하고 그들 앞에 실탄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있었다. 당시 광주 인구가 73만 명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구라고 볼 수 있다.
5월 21일 오후 1시경
시위대가 화염병을 계엄군의 장갑차에 투척하고 계엄군의 저지선을 뚫으려 시도했고 이때부터 계엄군은 집단 발포를 한다. 이날 발포로 100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계엄군 추산 사망자는 55~58명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날은 조준 사격이 있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격을 했다.
†광주 통신공사 사무실 창가에서 내다보던 직장인들이 총격으로 사망.
†도청과 떨어진 전남대 앞 주택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신부도 총격으로 사망
†헌혈 후 귀가 중이던 여고생 총격 사망.
그러나 군 자료에는 이날 발포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고 시민 발포에 군이 대응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광주 외곽 총격과 만행들
5월 22일
계엄군은 본격적인 진압을 위해 광주시내에서 잠시 철수 후 전국의 계엄군 병력의 절반 이상인 1만 5613 명을 광주 지역을 배치시키게 된다. 특히 공수부대원들에게 1인당 실탄 580발 수류탄 2개씩을 지급하면서 전시상황에 돌입한다. 광주시 외각 도로를 모두 봉쇄하고 외부와의 전화 연락도 두절시키고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는 광주에 간첩과 폭도들에 의한 내란이 발생했다고 연일 보도했다. 그리고는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5월 23일
계엄군은 광주 외곽에서 만행을 이어간다. 주남마을에서 공수부대는 길을 막고 사람과 차량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한다. 계엄군은 외부와의 차단을 위해 화순으로 통하는 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주남마을에 주둔해 이곳을 지나던 차량에 총을 난사했다. 이날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13명이 현상에서 사망, 3명이 총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부상자 3명 중 2명을 확인사살 후 암매장시켰다.
5월 24일
11 공수 송암동 근처를 지나던 중 매복해 있던 같은 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서 11공수 여단 대원 9명이 사망한다. 38명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11공수여단은 현장 수습을 한 후에 인근 마을 청년들을 무단 연행해 4명을 살해한 후 폭도들에 의한 전사로 왜곡 보고하고 무공훈장까지 추서 한다.
진월 마을 근처에 살던 11살 초등학생 전재수 군은 마을 공터에서 놀다가 공터 바로 앞을 지나던 공수부대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동네 저수지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공수부대가 총을 난사하여 13살 방광 범도 사망한다.
5월 27일 새벽 4시
3 공수여단은 광주시내로 진입 전남도청을 공격했고, 7 공수여단과 11 공수여단은 광주 곳곳을 공격하며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심지어 두 손들고 투항하는 사람들에게도 발포를 한다. 도청은 피로 물들었고 탱크와 헬기 사격까지 이뤄진 탄압에 시민들은 계엄군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1시간 만에 광주시를 계엄군은 장악을 한다. 수많은 목숨을 빼앗으며 참혹하게 끝이 났다.
5월 27일 오전 7시 27분
계엄군은 이런 발표를 했다.
'생활고와 온갖 위험에 시달리는 선량한 시민을 구출하기 위하여 군 병력을 광주 시내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장악한 후에도 무고한 희생은 계속되었다.
이금제 한약방으로 출근하던 길에 총격 사망.
김성근 우체국 근처에서 총격사망.
양동선 오세현 직장 근무 중 총격 사망.
김명숙(당시 14세) 계엄군의 검문이 두려워 도망치다 총격 사망.
염행렬(당시 16세)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사망.
5.18 사망자 및 희생자 수
- 5.18 민주항쟁 부상자 시민 2461명
- 연행, 구금된 시민 1147명
- 사망자 시민 160명
- 행방불명 81명
- 부상으로 인한 사망 110명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 자료 (2016)
5.18 민주화 운동 이후 상황
5.18 민주화 운동을 폭력 진압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한다. 국보위는
1988년 8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유신헌법에 따라서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전두환이 취임한다. 12.12 사태부터 6개월간 진행된 긴 쿠데타는 5.18 민주화운동 폭력 진압을 통해 권력을 찬탈하면서 마무리가 된 것이다.
유독 왜 광주만 계엄군 진압이 무자비했던 이유?
계엄을 반대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광주는 유독 강경 진압을 했다. 당시 5.18 민주화운동 배경에는 북한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 그 당시 남북은 총리회담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1980년 5월에 북한이 침략할 것이라는 '북한 침략 위협설'이 광범위하게 유포가 된다. 그러나 이 소문의 진원지는 중앙정보부였다. 바로 당시 중앙 정보부장 서리에 있었던 전두환이 있던 부서에서 이런 내용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검토에 나섰고, 미군도 또한 검토했으나 아무런 특이 징후가 없다고 확인이 되었다.
당시의 이런 안보위협설은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위해 퍼트린 민심 돌리기용 소문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신군부에 맞서 싸우는 자신들의 민주주의 운동이 이런 안보위협설로 신군부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10만 학생 시위 때 여러 구호 중에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내용을 넣어 자신들의 시위는 오직 신군부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임을 알렸던 것이다.
당시 광주에서도 북한이 도발 시 학도병 지원 의사를 대학생들은 밝히기까지 하면서 이런 민주화 운동에 대한 당위성이 북한과 관련이 없음을 부단히 증명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언론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신군부에게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안보위협설을 이용해 광주 이외의 지역에 국가의 안전을 위해 현재 자신들 신군부 쿠데타의 정당성을 얻어내기 위해 광주지역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상규명은 어떻게 되었나?
1988년에 광주 518 청문회가 열렸는데 시위 진압에 계엄군이 대검 사용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시위 진압 당시 대검을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는 계엄군의 주장과는 달리 신문 기사에는 대검으로 인한 자상 사상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2018년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에서 1980년 당시 군 자료를 점검하니 당시 군 자료가 의도적으로 조작, 은폐된 것이 확인되었다.
집단 발포 명령자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집단 발포를 명령한 사람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반면 당시 체포된 광주 시민군들은 계엄군에게 끌려가 매일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끌려간 1200여 명의 광주시민들은 영창에 한꺼번에 수용되었고 포로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모든 행동을 감시당하고 잠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정자세로 앉아있도록 고문당하고 심한 구타를 했다. 내란죄를 씌우기 위해 거짓 진술을 강요했고 저항하면 모진 고문으로 결국 자백하게 만들었다.
내란죄로 몰란 광주시민 198명은 17년 만에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군부에 있던 계엄군 지도부들, 영관급, 지휘관들은 이들이 고초를 겪는 동안에도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
5.18 민주화 운동은 아시아에서 가장 상징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되어 2011년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또 다른 민주화 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1993년부터 국가차원으로 재평가되어 각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1997년부터는 법정 기념일로 제정되기도 했다.
광주에 518 버스는 5.18 기념공원부터 5.18 기념관 5.18과 관련된 주요 유적지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시내버스이다.
[출처 ebs 어느 오월의 증언, 역사저널 그날 ]
5.18 내용 선을 넘는 녀석들 버전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