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1회]
오늘의 탐사지: 허준박물관
주제: 허준 이야기
출연자: 설민석
허준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 전문 박물관이다.
구암 허준 그는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잘 보필했던 허준을 실제로 초상화가 그려졌으나 현재는 소실된 상태로 위 초상화는 허씨 가문 후손들의 얼굴을 조합해서 그린 그림이다.
허준 일대기
허준은 30세 이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30대 이후에 궁에서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과 선조 때 경연관이었던 지금의 대통령 자문기구 역할을 하던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잠깐 언급된다.
드라마 속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가상 인물이다. 허준은 약재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약재를 공부하고 검증 했고 신분과 상관없이 환자를 살폈던 참의원이었다.
조선시대 의사가 되는 방법 3가지
1.혜민서와 전의감에서 공부
혜민서는 서민의 치료를 주로 하던 의료기관으로 교육보다는 서민의 치료에 중점을 둔 기관
혜민서보다 고등교육을 행하던 전의감은 의료 행정과 의학교육의 중추기관
2.의원 집 자제로 태어난 경우
주로 대를 이어 의원이 되었던 조선 시대 오랜 기간 축적되어 온 가문 고유의 처방과 의료기술이 존재
3.독학으로 의학 공부
의서를 읽는 것은 글공부의 연장선으로 의학에 해박한 분이 서애 류성룡 다산 정약용 실제로 천연두의 항체연구를 한 정약용
조선의 관료체계
9품은 정,종으로 나뉘어 18품이 있고
6품부터 정,종은 다시 상,하의 2개 품계로 나뉜다. 정1품상은 영의정이다. 이렇게 30계로 나뉜다.
당상과 당하의 차이는 당하관은 밖에 서있으나 당상관부터는 임금 옆에 앉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의과에 1등으로 합격하면 종8품 부터 시작한다.
허준의 <찬도방론맥결집성>
유희춘의 추천으로 궁궐의 내의원으로 들어간 허준은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의관 생활을 시작하고 선조의 맥을 짚기 위해 들어간 어의 보조시절 선조의 눈에 들어 선조는 맥집는 법에 대한 책을 편찬하길 명령한다. 그래서 진맥법을 집대성한 중국의서<찬도맥결>을 교정한 <찬도방론맥결집성>제작한다.
허준의 또 다른 의학서적
<신찬벽온방>
보물 제 1087호로 지정된 허준의 또 다른 의서 <신찬벽온방>은 전염병 치료서이다.
조선시대 빈번히 창궐했던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백성이 죽어나가자 광해군의 명을 받아 집필한 것이 신찬벽온방이다.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 등을 담은 보물 같은 의서이다.
허준은 어떻게 선조의 주치의가 되었나?
허준은 유희춘 덕분에 빠르게 종4품 관직을 달았다. 그후 광해군의 천연두를 저미고라는 [용뇌(약재)+돼지 꼬리 피] 치료제를 사용해 치료한 후 서자 출신 허준의 파격적인 인사발령 정3품 당상관에 오른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란을 가고 이때 선조와 함께한 신하는 문,무관이 17명 환관 등 까지 총 30명이었다. 이때 의관은 허준과 허준의 동기 이공기(침의 달인이라 불림)가 남아 있었다.
1596년 임진왜란 중 피폐해진 조선 백성들은 질병으로 고통받자 선조는 허준에게 <동의보감>집필을 명한다. 그렇게 전쟁 중 정작,김응탁,이명원,정예남 등 의관 6명과 내의원 대표 능려자인 수의 양예수까지 참여하여 동의보감 편찬이 시작되다가 정유재란으로 인해 편찬 작업이 잠시 중단된다.
임진왜란 이후 공신으로 책봉되어 종1품 숭록대부로 승진을 한다. 서자출신으로 인생 역전인 샘이었다. 임진왜란 후 선조는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혼자 마무리하라고 명한다. 그 후에 부인과, 소아과 <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등 각종 의학서를 편찬한다.
허준 선생님이 말년 72세에 동의보감을 마무리 완성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설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여류시인 허난설헌,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 등이 모두 양천 허씨다.
중인은 과거시험에도 잡과만 가능한 제한이 있는 계급인데 서자 출신인 중인 허준은 종4품->정3품 당상관->종1품 으로 고속 승진으로 주변의 시기 질투가 많았다.
허준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었던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대신들은 어의 허준이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선조가 세상을 떠난 것이라 중형을 요구하고 허준의 무고함을 알지만 난감해진 광해군이었다.
허준은 광해군의 천연두 치료뿐만 아니라 전쟁이 잠잠해진 1596년 중병에 걸린 광해군을 극진히 치료해 광해군의 목숨을 또 한번 구해준다. 두 번이나 광해군을 살린 허준이기에 원래는 어의로서 왕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했으나 허준을 아꼈던 광해군은 중형 대신 유배형을 내린다.
허준이 유배를 간 곳은 의주로 그의 나이 60대 후반에 <동의보감>을 마무리에 들어간다. 약 2년 정도 후 광해군의 호의로 유배에서 풀려 나서 바로 허가바위가 있는 그 동굴에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고 추정한다.
이곳은 양천 허씨 문중의 터이다. 같은 문중의 선조들이 거쳐 갔을 장소이다. 1610년에 동의보감의 완성 될 때쯤 허준은 72세였다.
당대 사람이 쓴 <파릉선집>에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광해군에게 1610년 <동의보감>완성본을 올렸고 14년에 걸친 의학자 허준의 집념으로 완성된 조선 백성을 위한 의학 백과 사전 <동의보감>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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