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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하마스 탄생, 확장 /가자지구, 서안지구 분리 언제? 129-2

by 365 ^^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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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 사상적 기반 무슬림 형제단이 무장단체가 되기까지 129 -1

 

캠프 데이비드 협정 

4차 중동전쟁 이후 5년 뒤 1979년에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는 전격적으로 평화협상을 맺는다.  협상에 난항을 보이다가 평화 협정의 중재자로 나선 미국의 30대 대통령 카터에 의해 1978년 9월 17일 카터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집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총리를 초대해 평화협정을 이끌어낸다 .

 

이 협정으로 시나이 반도에 주둔해 있던 이스라엘군의 철수 후 이집트에 반환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독립에 관한 얘기는 별다른 진전없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정부를 허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게다가 이 협상으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이집트 총리는 중동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한다. 

 

이집트 3대 대통령 사다트 와 이스라엘 총리 노벨 평화상 수상 장면

 

그러나 이일을 계기로 사다트 대통령은 1981년 10월 6일 사다트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암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사다트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한 채 이집트의 이익만을 챙겼다는 비판을 받으며 아랍세계의 배반자로 낙인찍혀 무슬림 형제단이 이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 장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은 무슬림 형제단에서 파생된 조직인 이슬람 지하드 소속의 육군 장교 칼리드 이슬람 불리였다.

 

하마스의 탄생 

당시 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이집트 4대 대통령이 된 후 집권 초기에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 무슬림 형제단과 친화적 관계를 형성하며 그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평화를 유지하며 이집트 경제 회복을 위해 친서구정을 펼치니 무바라크의 친서구 정책에 반발한 무슬림 형제단은 테러를 시작한다. 이에 무슬림 형제단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집트 내 핵심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을 떠난다. 

 

 

무슬립 형제단은 해외 여러지부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출발한 것이 1987년 12월 10일 탄생한 하마스이다. 하마스 창설자는 아흐메드 야신이라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하마스라는 단체를 만들었다고 이스라엘에 강경한 투쟁을 하다가 세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하마스의 목표는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이슬람 국가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이스라엘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마스의 세력 확장 

1987년 인티파다부터이다.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운동을 의미한다. 사건의 발단은 1987년 12월 8일 이스라엘에서 가자지구로 넘어가는 검문소에서 탱크를 실어나르던 이스라엘 군용차량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받으면서 차 안에 타고 있던 4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잃는다.

 

 

사고 이전에 사고를 낸 이스라엘 사람의 친척이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살해를 당해 거기에 대한 보복으로 사고를 냈다는 소문이 있어서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사고로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졌고 집회가 시위로 발전하게 된다. 이 저항운동은 무려 6년이나 이어진다. 

1987~1993 동안 지속되었던 인티파다

 

이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전기와 통신선을 모두 끊어버리고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집을 찾아내서 집을 철거했다. 그리고 이때 하마스가 직접 1차 인티파다에 참여하게 된다.

 

오슬로 협정 

1차 인티파다의 중재자로 다시 미국이 나선다.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면서 이스라엘은 PLO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PLO도 이스라의 존재 근거를 인정하여 공존의 가능성을 협의한다. 

 

오슬로 협정

 

이 협정의 두 가지 사안은 1994년까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수립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향후 5년간 1999년까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단계적으로 이스라엘군을 철수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과 PLO간의 경제 협력과 지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마스가 PLO를 비난한 이유 

그리고 1차 인티파다 이후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PLO의 성격이 결성 당시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PLO 결성 초기에는 이스라엘 타도와 팔레스타인 해방을 목표로 강경 투쟁을 했던 단체였다. 그러나 1차 인타파다 기간동안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는 힘들다고 판단했고 이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려고 했다. 이에 하마스는 강경파 무장조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1964년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건설하기 위해 아랍연맹의 후원으로 공식 출범한 조직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탄생과 확장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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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협정을 인정할 수 없던 하마스는 본격적으로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한다. 1996년 2월과 3월 수차례 버스 자살폭탄 테러를 벌이면서 이스라엘 사람이 60여 명이나 사망한다.  

 

 

자살폭탄 테러를 한 많은 청년들이 사망했고 2000년까지 하마스의 자살폭탄 테러는 이어졌다. 이에 미국, 영국등 서방국가들은 하마스를 테러 단체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때 부터 PLO와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독립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간다. 

 

2004년부터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로켓을 쏘기 시작한다. 그에 대항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2004년 3월 22일 하마스의 지도자 아흐메드 야신이 사원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중  이스라엘이 쏜 미사일에 표적 살해 당한 것이다.  야신의 죽음으로 분노가 극에 달한 하마스 지도부는 보복을 경고한다. 

 

 

2005년 하마스는 정당을 창당한다. 무장 조직을 넘어서 정치 정당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에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마스 VS PLO 정당 파타의 대결 구도가 된다. 당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집권당이었던 파타의 입지를 흔들기 시작한다. 2006년 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132석 중 74석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국민들이 많은 국제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이 무능하고 부패한 파타 정당에 쌓은 분노를 이렇게 하마스에게 밀어줬던 것이다. 이에 하마스가 정권을 잡자 미국과 UN은 경제적 지원을 모두 철회한다.

 

가자지구 서안지구 분리 

그러나 하마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심지어 2007 6월 10~15일 파타와 내전을 벌여서 승리한 후 가자지구에서 파타 세력을 축출해 버린다. 그결과 하마스와 파타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각각 나눠갖게 된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에 대한 세력 확장을 의식해서 2006년에 약 2900억 원으로 가자지구에 7m높이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을 건설한다. 사실은 이스라엘은 이미 1994년부터 가자기구 이동을 통제하는 60km 의 울타리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가자지구는 우리나라 세종시 크기로 세종시의 인구는 약 38만 명이다. 그런데 가자지구 인구는 약 23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가자지구는 세계 최고의 인구 밀집지역 중 한 곳이다.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실업률이 50%나 된다. 

 

 

2018년 이스라엘은 이미 있는 장벽가 더불어 해상 장벽까지 설치해버린다. 하마스 특수대원들이 수심이 얕은 곳으로 침입해서 공격을 해오니 바다 장벽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하마스와의 충돌이 격해질수록 가자지구의 분리 장벽은 견고해졌다. 2020년 이스라엘은 분리장벽을 또한번 업데이트 한다.  2021년 12월 7일 약 1조 3천억원이 투입된 가자지구 스마트 장벽이 완공된다.  하마스를 방어하기 위해 가자지구 기존 장벽 뒤에 설치했다. 

 

높이가 6m 길이 65km 의 스마트 장벽

 

스마트 장벽에는 감시 카메라와 감지 센서등 최첨단 장비를 갖췄다. 이렇게 가자지구는 지상과 해상 모두 철저히 봉쇄되었고 가자지구 주민들의 이동 또한 통제되어 가자지구에서 나가기 위해 검문소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가자지구 사람들의 일부는 이스라엘로 가서 저임금 노동을 하는데 매일 2~3시간의 철저한 검문은 필수이다. 

 

현재 라파 검문소로만 구호물자가 들어가고 있다. 

 

결국 하마스 집권 이후 지속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로 하마스는 이에 계속되는 무력으로 대응했다. 

 

▷2008년 이스라엘군이 하마스 대원을 3명 사살하자 70발 이상의 로켓을 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를 무차별 폭격한 이스라엘이다. 이로인해 민간인들의 피해가 극심한 상황이 되었다. 

 

▷ 2012년 11월 4일 하마스 사령관을 표적 암살하자 이스라엘 스스로 지옥문을 열었다고 하마스는 공식 입장문을 내놨다. 

▷ 2014년 이스라엘 10대 소년 3명이 하마스에게 살해당하자 보복으로 하마스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자지구 건물들을 폭격 주거지는 물론 병원 학교도 포함되었다. 

 

▷ 수십년간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피의 보복은 계속되어 왔고 2023년 10월 7일 수천 발의 로켓이 이스라엘로 기습 공격을 가했다.  이스라엘의 최첨단 아이언 돔도  동시에 방어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했고 20분 동안 5000발의 로켓을 막아내기에는 힘들었다.   

 

 

또한 이번 공격의 다른 점은 하마스가 약 천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직접 이스라엘 영토내로 들어온 것이다. 하마스의 이런 기습 침공에 전세계가 놀랄수 밖에 없었다. 하마스는 드론 폭탄으로 감시탑을 파괴해서 스마트 장벽을 통과했고 이스라엘 남부 음악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로 오토바이, 트럭, 낙하산을 타고 침투해 순식간에 축제 현상을 포위하고 탈출을 시도하면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고 그 결과 행사장에는 시신 260여구가 발견되었다. 이 축제 현장뿐 아니라 하마스의 침략으로 민간인 약 천여 명이 사망한다. 문제는 하마스가 이스라엘 곳곳을 장악하는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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