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위대한 유산으로 피라미드 신전, 파피루스등이 있는데 이집트는 100년마다 큰 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이 있는데 1822년 로제타스톤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면서 현대적 이집트가 시작되었고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되면서 학계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이 되었다. 당시의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나라의 무령왕릉도 발굴당시 연기가 퍼졌다. 비가 쏟다졌다. 사람들이 다쳤다. 는 설이 있었는데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을 깨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파라오의 저주
그런데 파라오의 무덤을 깨운 한 남자 영국의 부호 카나본 경은 모기에 물려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스터리한 죽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카본 경의 처남은 정신착란으로 사망을 했고 동료였던 한 교수는 원인 모를 고열로 사망했다. 또한 또 다른 동료는 아내가 쏜 총에 살해되었다. 이렇게 수십명이 사망하게 되었고 이들의 공통점은 1922년 한 파라오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였던 것이다. 그 무덤의 주인은 투탕카멘이다.
유럽인의 이집트 유물 약탈
1920년대 유럽인들의 이집트 유물 찾기 열풍이 있었다. 이집트 유물이 유럽인들에 반출되는 것이 당연시 여겼던 시기이다. 우리도 겪었던 아픔 일제강점기 수많은 문화재가 반출되었는데 도굴을 로망으로 포장한 것에 일조한 할리우드 영화로 바로 '인디아나 존스'이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략했을때 나폴레옹은 약 170명의 학자를 동원해 유물을 수집했다. 그런데 그 나폴레옹 군대를 영국 함대가 격파시키면서 프랑스 학자들이 찾은 로제타스톤도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120년간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유물 확보 경쟁에 들어갔다.
심지어 이것을 돌려줄수도 없게 1954년 헤이그 조약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체결된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 조약으로 강대국 중심의 문화재 보호 조항도 포함되어 있고 그들은 고대 이집트인은 지금 이집트인의 조상이 아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이라는 둥의 다양한 논리로 문화재 찬탈을 합리화하여 반환 가능성을 낮추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는 1517년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다가 1914년 영국의 보호령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서구문물이 들어오게 되니 이집트도 서구화를 급히 서두르게 되고 이를 위해 돈이 필요했기때문에 유럽 자본을 들여오는 대가로 유물을 내어주기도 했다. 또한 20세기 이슬람교도 이집트인들에게 고대 문명 (다신교)은 이교도였기에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수많은 유물이 유럽으로 반출되었던 것이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 과정
1827년 프랑스 영사가 이집트 유물을 25만 프랑에 판매를 한 적도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노동자의 1년 연봉이었다. 투탕카멘의 카나본 경도 역시 이집트 유물 발굴에 투자를 하게 된다. 그의 목표는 투탕카멘 무덤이었고 이를 이끈이는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였다.
당시 기록화 출신 말단 고고학자였던 하워드 카터는 우연히 발굴을 하다가 투탕카멘에 대한 단서는 찾아내고 확신을 갖게 되면서 카나본 경을 투자로 이끈 것이다. 그래서 10년을 발굴에 매진하게 되고 카터의 마지막 발굴도전에서 1922년 11월 4일 투탕카멘의 작은 입구가 발견되었다.
이 입구는 10년 전 처음 단서가 발견됐던 곳 람세스 6세 무덤 옆이었다. 당시 투탕카멘 무덤 위에 람세스 6세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가건물을 설치놔서 다른 곳을 파다가 처음의 장소를 다시 발굴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입구를 찾게 된 것이다.
투탕카멘 무덤의 모습
조심스레 입구를 여는 순간 입구가 드러나는 계단이 있었고 이곳은 자갈과 토사로 막혀있는 것을 드러냈다. 구멍을 뚫기 전에 윗쪽 벽쪽에 새로 바른 회벽 자국이 있었는데 이미 도굴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막힌 벽을 뚫고 들어가자 황금으로 빛나는 전차, 왕좌, 보물상자, 의례용 침대와 파라오를 위한 음식까지 그 방에는 수십 점의 유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도굴꾼들은 상자안에 들어있는 작은 유물만 도굴이 되었고 가구처럼 큰 유물들은 원상태 그대로 있었다.
파라오 무덤은 전실과 묘실로 구성되어 있다. 묘실은 왕 파라오 미라가 안치되어 있는 공간이고 그 앞에 방 하나를 두는데 그래서 전실이라 부르고 묘실 앞 파라오의 물건 부장을 두었다. 전실과 붙어 있는 별실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추가로 보관했다.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 생활을 믿었기 때문에 부장품을 함께 묻었고 묘실에 그려진 파라오 장례식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파라오 미라는 잠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망자를 깨워주는 의례가 필요했고 개구 의식으로 입을 열어줘야 사후에 왕이 말하고 먹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의식을 그려놓은 것이다.
하워드 카터는 유물보존과 사진기록으로 발굴에 수개월을 보냈다. 새로운 보존기술을 이용하고 철저히 사진 기록을 남겼다. 투탕카멘 무덤의 황금 전차는 고대 이집트가 아프리카 , 아시아 민족과 전쟁을 치렀음을 알수있는 유물이었고 왕조에 그려진 그림은 소년 투탕카멘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놨다.
카터가 입구부터 묘실까지 발굴하며 전진하는데 7주가 걸렸고 최초 발견 후 4개의 공간 발굴 마무리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현장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미국 사진작가 해리버튼의 도움을 받기도하면서 고집스럽게 발굴의 원칙을 지켰던 카더의 노력으로 투탕카멘은 3000년이 지나도 우리 앞에 있다.
묘실에서 발견되 황금 마스크, 파라오의 관은 3겹으로 마지막 속관은 금으로 만들어졌다. 관 전체가 순금으로 무게가 110KG에 달했다. 도굴꾼이 못 움직이도록 좁게 설계가 되어 있다. 속관 안데 미라가 안치되어 있었고 머리 부분이 황금마스크 10KG이었다. 전체적으로 금이 300KG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먼지처럼 금이 많은 나라라고 부러워 할 정도로 화려한 만큼 도굴의 대상이 된 이집트 파라오 무덤들이다.
투탕카멘 유물이 영국으로 반출되지 않은 이유
그러나 전 재산을 투자했던 카나본 경이 벌어들인 수익은 없었다. 카나본 경이 발굴 5개월 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발굴 수익권이 공중에 날라갔고 이집트가 영국에 가장 치열하게 독립 운동을 했던 해가 1919년이고 투탕카멘이 발굴된 1922년은 이집트가 영국으로 독립이 된 해이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가 민족주의가 고취되어 있는 상황에 자국의 유물 반출 경계가 시작되었고 반영감정이 높았고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한 주체가 영국인 하워드 카터와 카나본 경이었기 때문에 여론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집트 정부는 카나본 경 측에 발굴 투자금은 보상을 해주기로 하고 단 발굴된 유물은 이집트에 남기고 떠나게 된것이다.
투탕카멘 죽음의 비밀
18세에 사망한 소년왕 투탕카멘의 사인은 미스터리였다. 무덤에서 발견된 다른 파라오의 부장품이 발견되었고 벽화의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무덤을 봉인한 흔적도 있었다. 누군가 서둘러 투탕카멘의 죽음을 덮으려 했다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사인을 밝히지 못하고 사망했다.
투탕카멘의 시신은 3000년이 지났으나 미라의 뼈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되면서 양호하게 보존이 잘되어 있어서 현재 X-RAY 촬영을 해보니 왼쪽 무릎에 골절이 발견되었고 투탕카멘 사망 며칠 전에 부상을 입은것으로 추정되고 당시 의료 수준에서는 골절은 치명상이었을 것이고 DNA 추출 분석결과 투탕카멘은 악성 말라리아를 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투탕카멘 무덤 부장품으로 발견된 주니퍼베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진통제로 사용되었던 열매로 죽기 전 큰 고통을 겪었다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말리아아와 골절로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에 이른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DNA등으로 다시 확인된 것은 고대 이집트 왕실의 근친혼이다.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이 높았고 투탕카멘의 아버지는 친누이와 결혼해 투탕카멘을 낳았다.
이런 근친혼으로 인해 투탕카멘의 발은 정상이 아니었다. 한쪽 발이 안쪽을 휘는 내반족 기형이었다. 그의 묘에서는 지팡이 130여개가 발견되었고 투탕카멘이 다리를 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은 불편한 몸으로 살다가 이른나이에 사망한 어린왕이었다. 투탕카멘의 시기는 아버지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으로 다신교-> 일신교로 변경하려했으나 실패하고 아버지 사망 후 정세가 불안해졌고 투탕카멘은 위기를 수습하려했지만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다. 업적을 남길 기록화가 별로 없는 왕이기도 하다.
투탕카멘 저주설의 진실은?
투탕카멘의 저주설은 사실이 아닌것으로 사망자 대부분 고령, 질병, 사고등으로 기본적으로 사망 확률이 높은 상황의 사람들이였고 정작 발굴 주도자였던 하워드 카터는 1874년~1939년까지 장수하다가 사망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