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

통영상륙작전 : 귀신 잡는 해병대 별명 탄생시킨 통영 전투

by 365 ^^ 2023. 9. 13.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군사력

1950년 3월 조선, 소련 군사비밀협정을 맺고 정찰기 20대 폭격기 30대 전투기 100대 탱크 200대 를 소련으로부터 받고 중국 마오쩌둥에게 서한을 보내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조선인 부대를 보대 달라고 해서 중공군 조선인 부대 약 5만 명을 입북시켰다. 이 사람들은 포탄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포탄인지 아닌지 가늠할 만큼 중국 국공내전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군대가 주축이 되어 19만 명 병력이 200대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하며 6.25가 발발한다. 

 

 

반면 한국군의 군사무기는 정찰기 몇 대 탱크는 하나도 없었고 일제가 남기고 간 보병총으로 무장한 9만 명이 전부였다.  이로 인해 파죽지세로 밀렸던 것이다. 

 

통영 상륙작전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내려갔다. 만약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면 남한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최선을 다해 지켰고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북한군은 낙동강을 우회해서 공격하려 했다. 통영으로 내려가서 거제도 가덕도 부산을 점령하려 했다. 그래서 통영은 하루 만에 함락을 당한다. 통영시민에게 이것은 지금도 트라우마인데 현재까지도 그때 얼마나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이때 김성은 중령은 통영을 사수해야 한다고 사령부를 설득해 세 번 만에 통영 침투 허락을 받는다. 이렇게 북한군이 점령한 통영반도에 상륙해 탈환을 감행한 작전이 통영상륙작전이다.

 

통영상륙작전 전개과정

당시 통영상륙작전의 전략은 해병대가 단독 진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해군 함선은 통영항에 진입해 함포사격을 시작했고 인민군은 이에 통영항에 집결한다. 우리 군은 반대편 장평리로 상륙했다. 

 

 

당시 우리 해군이 가지고 있던 함선은 단 6척이었다. 해군 함선 6척을 전부 통영항으로 이동시킨 후 장평리에 상륙할 배가 없던 해병대는 엔진도 없는 민간 어선을 징발해서 장평리 해안으로 인원손실 없이 상륙했다. 이렇게 함선 6척으로 통영항에 북한군의 시선을 붙잡아둔 뒤 민간 어선을 타고 장평리로 기습 상륙한 해병대였다. 

 

원문 전투 

이후 우리 해병대는 원문으로 이동해 북한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에 북한군도 모든 전력을 원문으로 이동시켜 남한 해병대와 북한군의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어  양측 모두 총탄이 고갈되자 백병전으로 맹렬히 공격, 우리 해병대의 승리로 통영 탈환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통영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469명, 해병대는 19명 전사했다. 20배가 넘는 피해를 준 압도적인 승리였다. 

 

* 귀신잡는 해병 탄생

백병전을 지켜보던 미국 기사 마가렛 히긴스는 우리 해병대를 귀신도 잡을 만큼 대단한 해병대라고 기사를 썼고 이때부터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이 탄생한 것이다. 

 

 

▼다음글 

영천 전투 : 뉴 코리아 계획을 무산시키다.

 

영천 전투 : 뉴 코리아 계획을 무산시키다.

[이전글] 통영상륙작전 : 귀신 잡는 해병대 별명 탄생시킨 통영 전투 통영전투의 승리로 적의 공격루트 하나를 차단한 것이지만 낙동강에서 북진한 것은 아니였다. 그래서 위기는 여전히 존재했

jangane.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