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글] 통영상륙작전 : 귀신 잡는 해병대 별명 탄생시킨 통영 전투
통영전투의 승리로 적의 공격루트 하나를 차단한 것이지만 낙동강에서 북진한 것은 아니였다. 그래서 위기는 여전히 존재했다. 부산 함락 이후의 계획을 미국은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 함동참모본부에서 승인한 계획은 신한국 계획이었다.
New Korea Plan
이 계획은 한국군과 정부 주요 인사들 약 60만 명을 태평양 한가운데 사모아 제도로 이주시킨 후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계획하고 있었다. 군인과 주요 인사 60만 명만 이주시켜 새로운 한국을 만들자는 일명 뉴 코리아 계획, 마치 대만이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세스 정권이 이전해 와서 성립된 국가와 같이 말이다.
영천탈환작전
이 소식이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고 있던 국군에게 알려지면 안되었기때문에 이 계획은 미국 내에서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당시 북한군은 9월 2일부터 영천을 기점으로 낙동강 전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영천 공세로 낙동강이 뚫리면 뉴 코리아 계획을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9월 5일 북한 15사단이 3개 방면으로 영천을 공격한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으로 인해 9월 6일 한국군은 영천읍을 빼앗긴다.
이때 영천 수비를 맡은 국군 2군단에서 무조건 영천을 지키기 위해 주변 사단을 모두 모아 국가 명운이 달린 영천 탈환작전을 펼친다. 미군에게 전차 5대를 빌려 마지막 반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영천으로 들어오고 있던 북한군의 후속부대를 공격하여 괴멸시키며 반전의 실마리를 마련한 영천 전투였다.
당시 공군의 포격때문에 밤에만 보급이 가능했던 북한군이였다. 병력과 보급 차단에도 북한군은 밀어붙였고 국군의 반격을 받아 궤멸적 타격을 입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와 자주포 병력 50%를 상실했다. 이렇게 영천 전투의 승리는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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