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이 계속되는 동안 고지를 쟁탈하기 위한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중에 철원지역은 강원도 일대 점령에 중요한 지역이었고 모든 전투에서 높은 지대 점령은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고 총격전을 벌일 때 총알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돌격 전을 벌일 때도 고지 위에서 아래로 돌격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유리하다.
백마고지를 쟁탈하려 했던 이유
이렇게 되니 중국군의 시선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지한 강원도 철원평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 해발 395 m의 고지가 있었는데 일명 철의 삼각지로 평강, 철원, 김화가 한가운데 395 고지가 있었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철원평야와 서울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 작은 395 고지만 점령하면 서울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강원도 윗지역 평강, 김화까지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395 고지를 전쟁 이후 백마고지라고 불렀다.
백마고지라 부른 이유
백마고지는 처음에 무명의 산이었으나 추후에 얼마나 치열하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싸웠는지 푸르던 산이 폭격을 하도 맞아서 하늘에서 보면 산등성이가 폭격으로 모두 잿더미가 되어 하얗게 보이는 것이 마치 누워있는 백마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백마고지 쟁탈전
6.25 전쟁 중 백마고지는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당시 백마고지는 우리나라 9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군의 3개 사단이 국군 9사단을 압박하며 포위하고 있었다. 협정 체결 전까지 무조건 백마고지를 사수해야 했다. 1952년 10월 6일 이른 아침 무자비한 총격 소리가 들린다. 준비 사격 뒤 포탄 2천여 발이 떨어지며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인해전술로 좀비 떼처럼 중공군은 돌격했다. 그 하루 동안만 고지를 뺏고 뺏기는 3차례의 공방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395 고지는 조그마한 야산이고 많은 병력 투입이 불가능했다. 1개 대대병력으로도 꽉차는 지역이었다. 이 작은 백마고지에 연대 병력 5천여 명이 투입된 것이다. 중공군은 약 14,000명이 백마고지를 침격하여 적군과 아군으로 인산인해였다. 또한 이곳은 끊임없이 폭격이 떨어지는 곳이어서 밤에도 낮과 같이 환했고 '해가 지지 않는 곳'으로 불렸다. 열흘간 전개된 백마고지 전투에서 폭격만 700회에 달했다. 한 시간에 3번의 폭격이 열흘간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2차례의 공방전이 있었고 7번의 수복, 주인이 바뀌는 고지전이었다. 치열한 혈전 끝에 10월 15일 국군의 9사단은 고지를 사수했으나 포격의 영향으로 백마고지가 원래보다 1m 낮아졌다.
하루도 못쉬고 밤낮 없이 전투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이 전투 이후 395고지는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을 지킨 육군 제9사단도 백마부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록에는 중국군은 5372 명 사상, 우리 군은 3500명 사상이었다. 중공군의 포탄의 수가 27만여발이었고 그래서 이곳은 정말 수많은 장별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백마고지에서 발견된 편귀만 하사 유해
1952년 27세 나이로 입대한 편귀만 하사는 유해발굴 당시 신원을 알수 있었던 개인 소장 만년필이 발견되었다.
->유해발굴과정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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