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춘천, 홍천 전투 / 한국전쟁때 사용했던 자주포 전차 차이점은?

by 365 ^^ 2022. 7. 24.
반응형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에서 이어진 북한군의 기습공격 300KM 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이어졌다. 30일내 남한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로 빠르게 북한군은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춘천 지역에서만 진격을 멈추게 된 북한군이었다.  완벽할 것 같던 북한군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춘천 전투

 

당시 춘천지역을 지키던 부대는 육군 6사단으로 한국 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부대이다.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춘천, 홍천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서 맹활약했던 장군이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북진하면서 가장먼저 압록강에 도착해 압록강 물을 대통령에게 바친 것이 청성 부대 6사단이기도 한다.  국군 6사단은 북한 2군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종오 장군과 6사단


1950년 10월 9.28 서울 수복이후 노획된 문서로 러시아어로 작성된 문서가 있다. 공격작전용 조선인민군 정찰 계획이다.  이 문서가 중요한 이유는 북한군의 계획인 3단계로 나눠 보여주고 있다.    

1단계- 서울-수원 축선 세 차례 한국군 포위. 섬멸 3일소요 
2단계 - 남한 내 공격 전개 및 예비 병력 섬멸
3 단계- 남한 내부 및 반도 남부해안 상륙 소탕작전

 


전력비교
당시 국군 6사단은 9300여명으로 방어라인을 구축하고 있었고 북한군은 무려 37,000 여명의 4배 차이였다. 북한군의 2군단은 실전경험이 아주 풍부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던 북한 2군단이었다. 



소련제 모터사이클 180대를 보유하고 있는 제603 모터사이클 연대가 북한 2군단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 참전한 소련 군사 고문단들이 독소 전쟁 경험이 있어 대평원용 모터사이클을 한국전쟁에 투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홍천과 춘천의 산악지역에 투입한 것이다.   

 

M-72 모터사이클


 자주포와 전차의 차이점

이들은 모터사이클을 이용 산악을 고속으로 달려 수원으로 기동하도록 계획했으나 불가능했다. 당시 북한군이 가지고 있던 비장의 무기가 있다.  SU-76 자주포 4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su-자주포, 100은 포탄의 지름을 나타내기 때문에 su -76은 이것보다 작은 것을 말한다. 개전 초 국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하지도 못했다.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주포는 자력으로 기동할 수 있는 차체 위에 포를 결합한 것으로 대부분의 자주포는 상하로 움직일수 있고 좌우로는 불가능했다. 뒤쪽의 적을 공격하려면 차체를 돌려야  가능하다.

 



반면 전차는 차체와 포탑이 분리되어 있다.  자주포는 곡선을 그리는 탄도로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지만 전차는 직선으로 발사되는 탄도로 근거리의 적을 공격한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자주포에 나뭇가지를 매달아 혼동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군 6사단에는 전차도 자주포도 없었다.  6사단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105 mm 곡사포였다.  방열이 필요한 재래식 화포였다. 그래서 포병 전력만 비교해도 춘천 지역은 북한군이 2배는 우세했다. 홍천지역은 북한군이 7배는 우세했다.    

 

곡사포


당시 군복과 철모도 부족해 일본군이 버린 것을 사용했던 국군이었다.  또한 식량도 부족해 남아있는 식량은 하루치 건빵 650상자뿐이었다.      

 



홍천 말고개 전투 

6사단 소속 11명의 특공대원에게 수류탄 2개와 안전핀을 제거한 포탄 1개를 지급했다. 이것은 충격만 닿으면 언제든 터질수 있는 상태였다.  당시 SU-76M 은 뚜껑이 없는 기종이었다. 

 

SU-76M

 

홍천 말고개에 나타난 북한군 자주포 10대가 올라오고 있었고 국군 대전차포 중대가 선두 자주포를 포격한 사이 멈춘 북한군 자주포를 기습 공격 자주포로 올라가 수류탄을 투척하고 자주포는 비탈길로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북한군 자주포 10대를 노획,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11명의 특공대원 중 부상자 1명, 특공대원 모두 생존했다.

 

11인의 육탄돌격대



춘천, 홍천 전투는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필사적으로 버티다가 결국 후퇴한 6사단이지만 춘천-홍천 지역의 지연 전투 기간 맥아더 장군이 수원을 도착.전선을 시찰할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에 스탈린은 북한군을 닥달하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개전 초기 북한의 압도적인 화력과 공격작전으로 한국군이 와해됐다고 생각하지만 UN 참전이 결정될 때가지 춘천-홍천 지역을 막아낸 6사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는 해전도 있었다. 

 

백두산함 역사(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대한해협 전투 의의

 

백두산함 역사(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대한해협 전투 의의

한국 전쟁때 해전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밤 부산 인근 해상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선박은 600여 명의 북한군을 태운 무장 수송선이었다.  그때 이를 막아선 작은 함선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

jangane.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