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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무예도보통지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유와 만든 이유

by 365 ^^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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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 통지란? 

24가지 무예 기술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것으로 조선의 무예 백과사전으로 무예가 담겨있는 그림과 설명(도보) 종합서적(통지)을 말한다. 북한의 신청으로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에는 무예도보통지를 소재로 한 영화도 있다.  무려 600만 관객에 관람한 흥행작이었다.

 

무예도보통지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



북한은 태권도 역사의 뿌리를 택견에서 찾고 있고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이 현대 북한 태권도의 원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태권도의 원류
북한 태권도와 한국태권도가 지금은 모양이 다르지만 뿌리가 같은 한국과 북한의 태권도이다.  또한 북한이 주장하듯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태권도의 원류라고 볼수도 있다.  현재의 태권도는 1959년 정립된 것이고 그 사이 일본의 공수도 등 다른 무예들의 영향을 받기도한 태권도이다.  

 

기창
장창
당파
쌍수도
쌍검
등패
월도/사도세자가 휘둘럿다는 검
편곤

 

 

무예도보통지는 김홍도가 그렸다?

무예도보통지 속 그림을 그림 사람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북한이 주장하나 사실은 4명 화원이 그린 것으로 확인되나 그 중에 김홍도는 없었다. 

 

조선시대 기록 중 가장 잘 남아있는 

정조시대 기록들

일성록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해 기록한 일기로 정조의 세손 시절 시작되어 대한제국까지 이어짐

원행을묘정리의궤
정조 시대, 총 8일간 화성행궁에서 벌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축제과정을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화성성역의궤
정조시대, 수원화성을 축성하여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 사항들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모두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무예도보 통지를 만든 이유는?   

 

5군영의 무예가 모두 달라 표준 무예서를 만들어 기준을 정립해놨던 것으로 주로 긴 칼을 쓰는 일본 사무라이들은 먼저 거리를 가늠하고 상대를 일격하는 검술이 발달하였고 칼을 숨기고 있다가 공격하는 기술도 발달되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편찬된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지 14년 만에 무예서 편찬을 지시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 당시 상황을 기록을 통해 접했을 정조였고 백성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을 것이고 어릴 적부터 많은 위협이 있던 정조였기에 무술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 또한 무예에 관심이 많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전쟁을 거치며 무예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무예서에도 관심을 갖게 된 정조였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시절 편찬한 무예서 <무예신보>를 계승한 것이 정조의 <무예도보통지>이다.  정조 입장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아버지 사도세자였고 그런 아버지가 관심을 가졌던 무예였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일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던 정조였다. 

15세사도세자는 무사도 들기 힘든 월도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사람이었고 무예서를 정리하기까지했던 아버지였다. 

정조가 장용영을 만든 이유 
당시 왕의 친위부대 5군영이 있었음에도 정조는 장용영을 또 만들었다. 그 이유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구선복이라는 인물때문이다. 구선복은 30년 가까이 군영 대장을 역임했던 사람이고 구선복이 정조 시대 중반기까지 병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정조는 병권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 믿을만한 군대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구선복은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희롱했던 사람이기도 한다. 

 



또한 당시 궁에 자객이 빈번이 침입할 정도로 정조의 왕권은 약했다.  병권을 쥔 구선복을 함부로 내칠 수 없었던 정조였다. 또한 구선복이 정조를 시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여기에 구선복의 아들 구이겸이 연루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구선복을 제거 병권을 쥐게 된 정조였다.  기존의 무예출신청->장용위->장용영을 독립군영 으로 만들면서 친위부대를 강화했다.  문반-규장각 무반-장용영를 만들어 문벌과 무벌의 정치적 결합을 타파하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무예도보통지>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누가 만들었나?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이끈이는 무사 백동수와 당대 최고 문인이자동료였던 이덕무, 박제가였다. 그래서 3인이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주도했다.  이덕무 자료를 찾아 고증 작업을 했고 백동수와 훈련을 받은 군사가 시험을 보이면 그것을 보고 그림을 그렸고 박제가는 자료를 정리하고 글씨를 쓰는 역할을 했다.  이 3인은 모두 서자이다.

 

박제가
박제가



조선후기는 무예도보통지의 보급으로 더 이상 무인들만의 것이 아니였다. 일반화된 무예와 함께 검무도 발달했다.  박제가는 기생 운심의 제자들의 검무에 감탄하여 춤사위를 기록한 검무기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표 무용 검무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무용으로 무예도보통지의 쌍검총도 속 동작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무예도보통지는 체육학과 무용학과 등에서 교재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검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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