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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백두산함 역사(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대한해협 전투 의의

by 365 ^^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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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때 해전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밤 부산 인근 해상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선박은 600여 명의 북한군을 태운 무장 수송선이었다.  그때 이를 막아선 작은 함선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북한군은 부산항으로도 들어오려고 했었다. 대한해협 해전인데 1950년 6.25일 20:12 에 검은 연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레이더 성능이 좋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야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근접해서 확인하니 무장한 600여 명의 북한 게릴라 부대가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백두산함 구입 과정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주요국가들의 해군력은 눈부시게 발전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해군 군사력은 너무나 빈약했다.  어선을 개조하거나 일본의 연안 경비정을 재활용하던 배들이 전부였다. 한국전쟁 발발 두달전까지 제대로 된 전투함은 전무했던 것이다.  그럴만한것이 해군 사관학교 출범이 1949년의 일이었다. 당시 해군 참모 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해상침략 대비를 위해 전투함의 필요성을절감하고 해군 장교들과 돈을 모아 전함을 구입할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해군 소위의 월급이 쌀 한말 가격인 15000원정도였고 장교들은 월급의 10%, 사병은 고물을 팔아 돈을 마련, 장교의 부인들은  바자회를 통해 돈을 보탰다.   이렇게 1 만 5천 달러가 모여졌고 국고 4만 5천달러를 합쳐 총 6만 달러를 마련한다. 현재 시세로 대략 수십억원이었다.

 


이렇게 모금한 돈으로 미국의 450톤급 전함인 화이트헤드호를 구매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이다.

 

미국의 450톤급 전함인 화이트헤드호

 

이 배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이 사용한 배로 전쟁이 끝나고 미 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활용되다가 퇴역한 배로 수리가 필요했던 배였다.  그러나 돈이 없던 우리군은 배에서 숙식을 하며 직접 배를 수리했다. 

 

백두산함 직접 수리

 

그러나 전투를 위한 포가 없었다. 그래서 하와이로 가서 3인치 포를 구매한다.  또한 포를 구매한 후 포탄을 사기 위해 괌으로 가서 포탄 100발을 구매했다. 

 

백두산함에 3인치 포 장착

 

이순신 장군과 놀라운 평행이론

그렇게 백두산함이 포와 포탄을 사서 구매, 수리, 국내 항구 순방 후 진해항으로 최종 귀항한 날이 1950년 6월 24일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백두산함의 젊은 60명의 승조원들은 북한의 무장 수송선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거북선도 임진왜란 하루전에 완성, 훈련을 마친날이 임진왜란 하루 전날이었는데 놀라운 팽행이론이다. 

 

백두산함 60명의 승조원들


대한해협 전투 

해군 본부로 격침명령이 떨어진것이 26일 자정이다. 이때 승원들은 모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최초 사격을 시작했다.  이 승조원들은 실제로 포사격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함을 명중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때가 자정이 넘는 깜깜한 바다였고 레이더나 사격 통제 장치가 없던 백두산함의 사격방법으로는 두가지가 있었다. 적함이 있는 곳에 조명을 비추는 방법(적함도 우리군을 볼수 있음) 과 다른 방법은 적함의 화염을 보고 쏘는 방법이었다. 함장은 최대한 적에게 가까이 가서 귀한 포탄의 명중률을 높여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적함과 1KM 까지 거리를 좁혔던 백두산함이었다. 

치열한 포격전
그리고 치열한 포격전이 시작되었고 포탄이 거의 떨어갈 시점에 적함의 중앙 하부를 한 발의 포탄이 맞추게 되고 적함은 서서히 기울어지면서 새벽 1시반 경 북한 수송선은 침몰하게 된다.  우리측 해군도 결국 2명의 젊은 승조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들은 순직하면서도 나라를 걱정했다.

 

전병익 사망
김창학 사망



대한 해협 해전 의의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로 부산항을 지킬수 있었고 한국 해군이 단독으로 한국전쟁 최초의 승리를 기록하게 되었다는 역사적의미와 함께 북한과 소련의 초기 작전 계획을 무산시킨 중요한 승리였다.  이후 7월 1일 해상 수송작전이 개시되어 부산항으로 수많은 병력과 물자가 들어오게 된다.  

 

한국  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을 유지하고 미국이 개입할수 있는 공간, 시간을 벌어준 것은 국군의 전투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백두산함이 없었다면 6월 26이면 부산이 점령되어 춘천-홍천전투, 한강 방어선 전투의 의미도 사라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들어올수 있는 교두보, 항구가 사라지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잃어버린 이름들을 찾아 추모비에 함께 새기게 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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