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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철원 디엠지 DMZ (노동당사,백마고지,화살머리고지 전투, 철의 삼각지)

by 365 ^^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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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한반도 5.6회]


오늘의 탐사지: 철원 DMZ 

주제: DMZ 
출연자: 설민석, 문근영 




철원은 한반도의 배꼽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 전쟁 전에는 철원은 38도선 위쪽이라 북한 땅이였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현재는 2/3가 남쪽의 땅이 되었다. 


지뢰와 무기등이 있는 군사작전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민간인 통제선을 그어 보호하고 있다. 

철의 삼각지 


철원-김화-평강으로 이루어진 삼각지대로 6.25 전쟁 당시 최고의 요충지로 삼각지내 내의 고지를 뺏고 뺏으며 수만명의 사상자를 냈던 곳이다.


6.25 전쟁의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였다.

노동당사 


<발해를 꿈꾸며>MV 속 그 장소 


광복 직후 이곳은 38선 북쪽에 위치한 북한 땅으로 노동당사가 있었다. 


6.25 전쟁 후 2/3가 남한에 수복되었으나 휴전 후 1년여 간 유엔 군정이 철원을 관리했다. 유엔이 인정한 남한은 =1948년 5.10 총선거가 치러진 지역만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철원은 선거를 치르지 못했고 나중에 1954년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가 관리하기 되었다. 



공산당들의 입장에서 반동분자, 지주, 자본가 등의 사람들이 끌려와 각종 탄압으로 고통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계단에는 탱크가 올라간 흔적이라 전해지는 부서진 계단이 보인다.





백마고지 전투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와 더불어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미군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이 중공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했던 격전지이다.


해발 395m의 고지로 395고지라고도 풀린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12번의 공방전 속에 24차례나 주인이 바뀐 끝에 중공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0월 15일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국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끔직했던 전투로, 전사자만 해도 2만 명에 달한다. 


폭격으로 민둥산이 된 모습이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 백마고지이다. 




화살머리고지 전투

화살머리 고지는 DMZ 안 남방한계선 넘어 위치한 곳이다.


남쪽으로 화살촉 모양의 돌출된 형태의 고지 모양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으로 1952년 10월부터 미군 2사단 프랑스 대대, 1953년 7월까지 국군 2사단(노도부대)이 중공군과의 2차례에 걸쳐 싸운 전투이다. 



281M 고지에 위치한 화살머리고지는 평범한 사람들도 올라가기 힘든 고지를 군인들이 뺏고 뺏겼던 장소로 그만큼 중요했던 당시 최고의 요충지였다.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이루어진 이곳은 정전 이후에는 남.북 모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2018년까지만 해도 완전 지뢰밭이였다.


이때 전투가 너무 치열해서 중공군 사망자 1200여명


우리측 사망자는 180명이나 되었다. 



셀수 없이 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은 고지 쟁탈전이었다. 



GP 앞 
화살머리전투 추모비 



1952년 화살머리고지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기리는 비석으로 이름 모를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운 이들을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휴전 협정 중 

왜 치열한 고지전이 계속되었을까? 



6.25전쟁 진행과정을 보면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까지 밀려 내려오게 되면서 38도선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교전을 반복한다.


이렇게 38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소련이 휴전회담을 제의한다. 



1951년 7월 휴전회담 개시 후 개성-판문점에서 2년간의 장기 회담이 진행된다. 
이유는 군사분계선 설정문제와 포로송환문제가 있었다.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

유엔군 측 입장은 군사분계선을 현재 전선으로 하길 원했고 


공산군 측 입장: 군사분계선=38선으로 하자는 것


포로송환문제 

유엔군 측 입장: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


공산군 측 입장: 출신지로 강제 송환 


그러다 1951년 11월 군사분계선 설정만 합의가 되었다.



포로 송환문제로 1년 반정도로 더 시간을 끌게 된다. 이렇게 현재 전선대로 군사분계선 설정이 합의되면서 한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우리의 '선' 을 지켜야 했다. 영토와 직결되어 치열할 수 밖에 없었던 전투였다.



또한 산악지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상 승패를 좌우하는 고지 선점이 최우선으로 화살머리 고지와 백마고지 부근에 위치한 철원역은 평강, 철원, 김화 철의 삼각지대로 통하는 주요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사수해야 했던 두 고지였다.


고지전의 특성은 위에서 보면 잘 보이나 아래에서는 시야확보가 어려워 집적 적진에 뛰어들어야 하는 치열한 육탄전을 해야했고 그렇게 고지의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 

한국 전쟁에 400만이 전사를 했는데 그 중에 300만이 휴전협정 중이 죽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이곳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남북유해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남북유해발굴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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