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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훈춘사건,어랑촌 전투)/홍범도,김좌진장군묘

by 365 ^^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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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0회]

 

오늘의 탐사지: 천안 독립기념관 

주제: 봉오동, 청산리 전투
출연자: 설민석 , 송일국

 

천안 독립기념관

 

19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을 계기로 건립된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본관 건물 겨례의 집을 비롯해 상설 전시관 7개가 있다. 

 

독립기념관 옆에는 조선총독부의 잔재를 가져다 놓은 부재 전시공원도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 개관일은? 1987년 8월 15일 ,나라를 찾고 주권을 회복한 광복절에 개관했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경술국치 이후에 광복회에 입단을 한다.

 

광복회에서 만난 박상진은 군대 양성을 위해 김좌진을 만주로 파견한다.

그렇게 만주로 향한 김좌진 장군

 

서간도 만주로 파견된 김좌진은 다시 북간도로 간다. 그때 조국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김좌진 소속의 광복회 회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상진은 이것을 예견하고 만주로 보냈던 걸까? 붙잡혀간 박상진의 유지를 이어받아 광복회의 꿈을 이루고자 다짐하지 않았을까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대한독립선언서
1776년 발표된 미국의 독립선언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하나로 규합시키며 왜 우리가 싸워야하고 왜 독립하려 하는지 그 명분이 담겨 있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같은 의미의

38명의 서명이 담겨있는 대한독립선언서를 김좌진 장군에서 내밀었다. 김좌진 장군은 망설임 없이 흔쾌히 서명을 한다. 그 서명란에는 무장투쟁을 외쳤던 신채호, 신민회를 조직한 이동녕, 유학자이자 계몽운동가 박은식, 중국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신규식이 있었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면서 무명의 김좌진이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고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의 영웅으로서 이름을 알리는 첫걸음이되었다.

무장투쟁 노선을 걷고자 한 만주의 독립투사들
국내에서는 평화적 방법으로 여러 열강들의 지지를 끌어내 독립할 것을 외친 3.1운동 기미 독립선언서와 달리

 

육탄혈전 맞서 싸울 것을 외친 대한독립선언서 내용이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어 그렇게 만주에서 장군이 된다. 그후 대한 군정서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게 된다. 1920년 290여 명의 훈련생을 교육시켰는데 전시 상황이라 겨우 6~7개월 만에 강도 높은 훈련으로 빠르게 끝마치고 바로 한 달 뒤 청산리 대첩을 치른다.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출산 후유증으로 홍범도의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고 갓난아이인 홍범도를 위해 젖동냥을 다닌 홍범도 아버지는 홍범도가 9살때 돌아가신다. 그렇게 고아가 된 홍범도는 밥만 주면 어디든 가겠다는 생각으로 군대를 들어간다. 그래서 15세때 군대에 자원입대를 하게 된다. 거기서 나팔수로 일했는데 홍범도가 입대한 시기는 1883년 임오군란 다음해였고 민씨 정권의 부패가 절정이었던 시기에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공격대상은 바로 농민이었고 상관의 계속된 폭력과 부당한 행동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고 결국 상관을 폭행한 후 입대 5년 만에 군대에서 도망을 친다. 

그렇게 3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인 절로 들어간다.  금강산의 신계사에서 승려가 되지만 승려 생활을 하다가 다시 산포수로 직업을 바꾼다. 화려한 총술 실력을 뽐냈던 홍범도는 함경도 북청 포연대(포수 연합회)에 가입하고 동료의 신임을 얻어 바로 포수 대장으로 선출된다. 그런데 1907년 나라를 빼앗기기 3년 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시행해 포수들의 무기를 모두 수거하기 시작하고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포수들을 설득, 단속법에 반발하는 포수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홍범도가 체포되지 않자 일제가 벌인 홍범도 체포 작전은 가족을 이용한다. 아들에게 아버지 홍범도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가짜 편지를 쓰게 해 아버지에게 전하게 한 것이다.  

 

 

일제가 준 가짜 편지를 본 홍범도는 아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아들의 귀 한쪽이 떨어져나간다. 

 

 

 

아들을 정신차리게 하기 위한 아버지 홍범도의 최후의 선택으로 일제 편에 선 것과 다름없는 아들에게 격분하며 항일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 후 상처를 회복한 아들 홍양순은 17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의병이 되서 1908년 여러 전투에 참가하고 참전 중 전사한다. 

홍범도 아내에게도 투항하라는 편지를 쓰게 한 일제지만 그 남편에 그 아내였다. 단호했던 홍범도 장군의 아내는 

혹독한 고문에 스스로 혀를 끊고 결국 계속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일제의 홍범도 체포작전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아내와 아들 가족을 모두 잃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그후 홍범도 장군은 군대를 조직해서 국내진공작전을 펼친다. 
흩어져있는 의병부대와 연합해 일본을 한 번에 몰아내야겠다 생각하고 만주로 넘어와 연해주, 만주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고 만주에 자리 잡은 홍범도는 함경도에서 이름을 날리던 홍범도를 필두로 군대가 조직이 되었는데 그것이 '대한독립군'이었다.

 

 

독립군 연합부대 결성

대한북로독군부

이후 대한독립군은 두만강 일대 일본군 초소를 연달아 공격, 무너트리고 이 상태에서 독립군은 연합을 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정한다.

 

삼둔자 전투 

 

독립군 부대들은 두만강 쪽 일본군의 초소를 공격하고 사라졌는데 일본군이 추격하지만 실패한다. 일본군이 다다른 지역은 삼둔자 지역이었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찾았지만 실패하자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애꿎은 조선인들에게 분풀이로 무차별 살육을 시작한 일본군은 삼둔자 주변에 매복해 있던 대한북로독군부(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에게 대승리를 거둔 전투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인 삼둔자 전투이다. 

우습게 봤던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소탕에 나선다. 

 

봉오동 전투 

이에 일본군 300여 명이 월강추격대를 편성하고 두만강을 건너중국 국경을 넘어서 독립군을 쫓아 추격하게 된다.  이에 우리의병들은 대한 독립군의 주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몸을 숨긴다.

봉오동의 지형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봉오동 골짜기의 주변으로 독립군 부대를 배치하고 매복시켜놓는다. 

 

치고빠지기 작전을 이용 일본군과 교전을 하다가 도망가는 척 유인하는 작전이었다. 봉오동의 유인작전을 이끈 사람은 이화일 분대장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한 독립군이 대규모 일본군 추격대를 교전하다 빠지고 유인작적을 행하던 중 변수가 생긴다. 유인작전 중 일본군의 월강추격대의 선발대가 전멸이 된것이다. 그러나 후발대 일본군이 끝까지 추격해와 일본군을 유인하는데 성공하고 봉오동 골짜기의 사방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독립군 연합부대의 맹공격으로 일본군은 궤멸된다. 

 

독립전쟁 1회전 봉오동 전투의 큰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이었다.

 

 


현재 봉오동 일부지역은 저수지로 조성되어 있다. 

 


훈춘사건 (1920.9월)
이렇게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대규모의 침투작전을 계획하고 독립군 말살을 위해 일제는 간도로 출병을 한다. 간도로 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려던 일본군은 중국에서 일본군 진입을 거부한다. 그래서 일본군은 만주 출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다. 중국 마적단을 매수

 

중국의 훈춘 지역에 있는 일본 영사관 습격을 사주하고 마적단은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거주지를 공격한다.  중국진입을 위해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 명목이라는 구실하에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모두 김좌진과 홈범도 장군을 비롯한 모든 독립군들이 회의를 한다. 북간도 대표 독립군 부대는 김좌진 사령관의 북로군정서였다. 그러나 북로 군정서 서일 총재와 김좌진 사령관의 의견이 행군 방향에 대해 엇갈린다. 

 

서일 총재 의견

 

김좌진 사령관의 의견

 

그래서 서일 장군은 접경 지역으로 북상을 하고 다른 독립군 부대 포함 김좌인 홍범도 장군은 싸우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한다.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26일 동안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이었다. 

 

다수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 동쪽 기슭 청산리의 어랑촌으로 집결한다. 

 
청산리 지역 특징

 

청산리 위치는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두만강 근처에 위치한다. 이곳은 산세도 험하고 잘 아는 지형이나 일본군 부대와 싸우기 좋은 수림 지대라 판단했다. 

 

 

 

백두산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고 은폐,엄폐가 용이한 지형이다.

 

김좌진 장군의백운평 전투 (1920년 10월 21일)
바로 그때 일본군의 간도 침입이 시작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좌진, 홍범도 연합 부대는 구역을 나눠서 배치하고 청산리 대첩에 첫 번째 화약을 당긴 전투가 바로 백운평 전투이다. (10.21)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 고지대 골짜기에 낙엽으로 매복하고 있었고 만주 한인들의 도움으로 독립군이 사기가 떨어져 도망갔다는 거짓정보를 유포하여 일본군을 좁은 계곡 안으로 유인 일본군이 독립군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 앞까지 도달했을 때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주위 산림이 워낙 깊어 조준사격이 불가능 했고 300명이 몰상당한다. 

 

홍범도의 

완루구 전투 (1920.10.21)

 

거의 같은 시각 홍범도 장군이 완루구에서 전투를 치룬다. 앞뒤에서 일본군이 오는 상황이었다.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홍범도의 치고 빠지는 작전에 자멸하게 된다. 

 

 

천수평 전투(1920.10월22일)
10월 21일 백운평 전투 승리 후 22일 새벽 갑산촌에 머물던 중 한인 동포들이 천수평에 일본 기마부대가 주둔한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천수평으로 이동 자고 있는 일본 기마부대의 말을 쏘고 일본군 기마부대 약 120기가 전멸을 한다. 
어랑촌 전투 (1920년 10월 22일)
살아남은 기마부태 몇명이 어랑촌의 일본군 본대로 도망가고 일본군의 길목을 지켜 일본군 본대까지 격파한다. 청산리 전투의 가장 큰 전투였던 어랑촌 전투였다. 독립군과 일본군 모두 최대 병력을 투입 당시 일본군은 1500여명이 넘는 상황이었고 일본의 화력에 열세로 치닫는 김좌진 부대는 많은 일본군에 포위되고 죽은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던 독립군은 여기가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던 순간 위에서 일본군으로 불비가 쏟아진다. 
완루구 전투를 마친 홍범도 부대가 어랑촌 전투 정보를 입수 지원을 온것이다. 이렇게 김좌진, 홍범도 장군의 연합으로 어랑촌 전투는 승리를 하게 된다. 
수능단골문제 : 청산리 대첩의 최대의 격전지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몇 안되는 독립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의미가 큰 전쟁이다. 

 

 

독립군의 무기 구입 과정

태평양 전쟁이후 일본군은 미국과 대립할 정도로 무기가 발달했었고 독립군의 무기는 체코 군단으로 부터 얻은 무기였다. 1914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군 영국,프랑스, 러시아와 독,오,이로 나뉘어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던 체코는 오스트리아군으로 편입되어 징병을 가게 된다.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포로가 되거나 스스로 항복하기도 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패전과 체코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연합은 한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기로 결정한다. 

 

독립을 위해 오스트리아와 싸우려면 서유럽으로 향해야 했기에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얼지않는 항구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여 돌고 돌아 서유럽으로 향한 체코 군단은

 

긴 여정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무기를 팔기 시작한다. 그 소식을 들은 독립군들이 와서 무기를 산다. 우리나라에게 동질감을 느낀 체코군은 무기를 팔기로 결심한다.

 

또한 무기 구입에 필요했던 자금은 철혈광복단인 청년비밀결사단체에서 일제의 현금 호송마차를 털어 탈취에 성공 이 사건이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다. 

그 돈이 독립자금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만주 동포들이 독립을 위해 선뜻 내놓은 자금을 모아 이렇게 모인 돈으로 무기를 장만할 수 있었던 독립군들이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 승리의 요인

 

 

 

 



홍범도 장군의 묘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 이후 1937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그곳에서 극장 수위로 일하다 외롭게 돌아가셨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구 중앙공동묘역에 위치

 

 

현재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을 추진예정이다.

 
김좌진 장군의 죽음
 
알려진 정황은 만주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김좌진 장군은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도정을 해야 하는데 비싼 중국인 도정료로 가기가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직접 정미소를 운영중에 박상실이라는 사람에 의해 암살을 당한다. 그때 김좌진 장군의 나이는 41세였다. 박상실은 공산주의자였고 도주를 해서 암살의 이유는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최근에 알려진 내용은 일제가 공산주의 만주총국의 행동대작 격인 박상실을 암살범으로 매수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암살 이후 묘를 훼손할 것을 우려해 그의 묘를 4년을 지켰다고 한다. 
 

김좌진 장군의 묘 

 
 김좌진 장군묘 뒤에서는 부모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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