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철도와 철원역 / 철원 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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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일제 강점기 철도와 철원역 / 철원 두루미

by 365 ^^ 2020.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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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한반도 5.6회]

 

오늘의 탐사지: 철원 
주제: 철원과 철원역 역사 

 

 

 

철원 지역 
 
▶제주도 , 백두산, 울릉도, 철원 평야가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직탕폭포 : 용암작용으로 현무암 지대형성

 

▶열하분출 

 

 
지반의 균열 사이로 새어나온 묽은 용암이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천천히 흐르다가 굳어진 철원 평야로 그 평야 위에 철원 오대미가 무럭무럭 자란다. 

 

▶옛날부터 예술작품에 많이 등장했던 철원이다. 그 중에서도 겸재 정선의 <정자연>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수탈의 상징 철도 

"조선을 위한 개발? 아니, 일본을 위한 착취 도구였다!"
조선에 철도가 깔리던 순간, 사람들은 문명의 발전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철길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조선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우리나라 철도는 모두 일본에 의해 설치된 수탈의 상징이다. 

 

 

조선의 철도 건설은 1899년 경인선(서울~인천) 개통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이후 **경부선(서울~부산, 1905년 개통)**과 **경의선(서울!신의주, 1906년 개통)**이 잇달아 건설되면서 조선의 철도망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 일본이 철도를 깐 이유

1️⃣ 군사적 목적: 러일전쟁(1904~1905년) 당시,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 물자를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 철도를 적극 활용했다.

2️⃣ 자원 수탈: 석탄, 쌀, 목재, 금속 자원 등 조선의 귀중한 자원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철도가 필요했다.
3️⃣ 식민 지배 강화: 조선을 일본 경제권에 포함시키고, 일본인 이민을 쉽게 만들기 위해 철도를 건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로 길이 31km

 

🚂 주요 수탈철도와 역할

경부선(서울~부산, 1905년 개통)

📌 조선에서 일본으로 빠르게 연결되는 철도
📌 쌀과 자원 수송의 핵심 루트
📌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

 

경부선: 서울과 부산 사이에 부설된 복선철도.길이는 441.7㎞

 

경의선(서울~신의주, 1906년 개통)

📌 만주와 연결되어 일본의 대륙 침략에 이용됨
📌 조선 북부의 풍부한 광산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

 

경의선 : 서울과 평안북도 신의주 사이에 부설된 철도

호남선(대전~목포, 1914년 개통)

📌 호남 지역의 농산물(특히 쌀) 수탈 목적
📌 일본 상인들이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는 데 기여

 

마지막  경원선 은 서울~원산을 잇는 철도로 길이 223.7㎞ / 호남선은 대전과 전남 목포를 잇는 길이 252.5 km

함경선(원산~나진, 1928년 개통)

📌 함경도의 석탄, 철광석 등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철도
📌 일본의 만주 침략을 위한 전략적 노선

 

조선인들은 어떻게 이용했을까?

조선인들도 철도를 이용하긴 했지만, 일본인과 비교하면 차별이 심했다.

🚉 운임 차별: 같은 거리라도 조선인은 더 비싼 요금을 냈다.
🚉 열악한 객차: 일본인은 깨끗하고 쾌적한 1~2등석을 이용했지만, 조선인은 overcrowded(과밀)된 3등석이나 화물칸에 타야 했다.
🚉 농민들의 피해: 철도 때문에 경작지가 강제로 수용되었고, 일본으로 쌀이 반출되면서 조선 내 식량난이 심해졌다.


수탈의 결과: 조선은 무엇을 잃었나?

쌀 생산량 증가에도 조선인은 굶주림
👉 조선에서 쌀 생산량이 늘었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특히 **"산미 증식 계획(1920년대)"**으로 인해 일본의 쌀 부족은 해결됐지만, 조선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산업 발전 기회 박탈
👉 일본은 조선에서 원자재만 가져갔고, 가공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조선의 철도는 조선인을 위한 산업 발전이 아니라, **"자원의 일본행"**을 위한 통로였다.

일본의 전쟁에 활용된 철도
👉 1930-40년대 일본이 태평양전쟁(1941-1945)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철도망은 병력과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해 더욱 혹사당했다.

 

 

경원선 중심역 

철원역

 

당시 철원역을 럭셔리하기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서울역과 비교되기도 했던 경원선의 중심역 철원역은 역무원만 80여 명이였고 철원의 수탈한 철을 운송하는 열차가 많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춘천 원주보다도 인구가 많았던 철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과 이어주는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던 기차는 1930년 당시 서민들은 타기 어려운 고급 교통수단이었다. 

 

당시 철원-금강산 가격 7원 56전 정도로 지금 시가로는 대략 2~30만원 정도였다. 거의 비행기 값 수준이었다. 

철원-내금강 '금강산선' 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철도였다.
 
 
지리상으로 서울에서 금강산을 가는 길목에 철원이 위치 지금은 철도가 끊어졌지만 금강산까지 불과 90KM거리에 있다. 
 
 

해방 후, 조선 철도의 운명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의 철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하지만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철도가 파괴되었고, 다시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북한 철도 분리: 경의선과 경원선(서울-원산)이 단절되면서 남북 교류가 막혔다.
철도 재건 사업: 1950-60년대 한국 정부는 철도 복구에 힘썼고, 이후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의 철도는 겉으로 보면 근대화의 상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수탈과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 철도 건설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적 이익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오히려 일본의 침략과 전쟁을 돕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의 철도는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 수탈철도"**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거의 흔적이다.

 
 
궁예의 태봉 궁궐터 
철원은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신라 왕조가 서서히 쇠락해가는 시기에 궁예는 철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꿨다. 궁예의 궁궐터가 철원내 DMZ  내에 위치하고 있다. 

 
철원 마스코드
두루미(=학)
 

두루미는 뚜루루루 하는 울음소리 때문에 두루미(순우리말)라 불렸다.

철원은 전 세계 두루미의 30%가 찾는 세계 최대 두루미 월동지이다. 두루미는 멸종위기종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철원 평야가 넓고 과고 화산활동으로 따뜻한 온천수가 나오는 샘통으로

 

얕은 물에서 잠을 자는 두루미의 최적의 장소이다. 또한 주민들도 탈곡 후에 볒집을 두어 두루미의 먹이를 제공한다.

 

철원은 아이러니 하게 분단된 덕분에 보호되었던 자연과 옛 풍경을 지금도 감상할수 있는 곳이되었다.  

 

선녀들 한번도 6회 계속 ▼
 

☞철원 디엠지 DM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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