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오아후섬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곳이다. 태평양 전쟁의 첫 공격지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일본에게 기회가 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기지에 있어야 할 함대를 하와이에 대거 주둔시켰던 것이다. 일본을 견제해서 태평양을 장악하려했던 미국의 의도가 있다. 결국 일본은 1940년 9월 북베트남 국경을 넘어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한다. 그런 다음 미국의 제재가 가해지기 전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진주만 공격 전 일본 상황
삼국 동맹 후
삼국동맹으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태평양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미국등 유럽 서양 국가들이 지배하고 있던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일대를 점령해나갔고 1941년 1월 아시아 최대 석유산지이자 전쟁에 필요한 고무 쌀등이 풍부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술라웨이섬까지 차지하게 된다.
일본에 가한 경제 제재
이를 지켜보면 미국은 1941년 2월 진주만 기지에 태평양 함대를 창설한다. 5월 기준으로 항공모함 3척, 전함 9척 포함 총 127척의 대규모 전력을 주둔시켰고 일본에 더 강력한 경제 제재까지 미국은 가했다. 필요한 석유의 80%를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에게는 타격이 컸고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진주만 공습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며 미국과의 전면전을 준비했다. 하와이에 입성한 일본 대사관에도 진주만에 있는 미군 함정을 감시하는 스파이 활동을 지켰다. 그리고 하와이 신문을 통해 미군의 군사력을 파악했다. 그리고 일본의 도조 히데키 총리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강하게 미국의 기습공격을 주장했던 인물로 두 사람을 필두로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시작한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6척을 앞세워 이투루프섬에서 진주만 공격을 위해 떠났고 보안을 위해 전파 장비 사용을 중지, 무선 침묵 상태로 이동을 시작했고 바다에 쓰레기도 버리지 않았고 은밀히 일본군은 이동을 했고 9일만에 하와이 공격 가능 거리에 접근한다.
사실 일본의 수상한 움직임을 미국은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상상도 못하고 있던 미국이었다. 일본의 공격 목표는 필리핀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사령관은 허즈번드 킴멜이었다. 하지만 키멜 제독 역시 진주만 공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신 일본의 공격에 대비해 모든 함대에 연료를 가득 채우고 언제든 항공기가 출발할수 있도록 항공기를 비행장 한가운데에 모아놓았다. 하지만 이것이 진주만 공습 때 피해가 커진 요인으로 작용한다.
진주만 공습 개시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개시한다. 바다 위 항공기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과 전투함 15척, 항공기 350여대와 함께 진주만 공격을 개시한다. 오전 6시 10분 일본의 1차 공격 준비가 시작되고 800시간 이상의 실전 경험을 갖춘 베테랑들로 구성된 부대는 태평양 함대와 항공기지부터 집중 공격했고 태평양 함대에 폭탄을 쏟아붓는 동시에 오하우섬 중앙의 미군 항공기지 휠러 비행장을 폭격했다. 일본은 진주만의 수심이 얕다는 정보를 입수해 이것에 맞는 어뢰를 개발 전함 애리조나의 탄약고를 터트리는데 성공하면서 한순간에 1177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일본은 2차 공격때 170 대의 폭격기로 2차 공격을 개시한다. 이미 좌초된 배들까지 끝까지 공격하며 1시간 50분만에 진주만을 빠져나간다. 이날 진주만의 피해규모는 18여척의 군함이 손상을 입고 항공기 188여 대나 파괴되었으며 군인과 민간인 포함 약 36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일본이 간과했던 것
일본은 2차 공격후 3차 공격으로 오일탱크와 병참기 공격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구모 지휘관은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더 공격하다간 손해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일탱크가 건재하면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의 항공모함(움직이는 비행장) 을 한 척도 없애지 못했다. 그것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진주만 공격 몇일 전 다른 바다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도 알고는 있었으나 멀리 하와이까지 온 이상 기습공격을 포기할수 는 없었다. 결국 3차공격 중지와 미국의 항공모함 파괴 실패는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뒤집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미국, 일본의 마지막 섬 격전지 오키나와 전투
1945년 태평양 전쟁의 종결을 위해 일본의 본토 공격 계획을 세운 미국은 본토와 근접한 보급 기지 확보를 위해 오키나와 공략을 시도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도 오키나와이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 미군 전사자가 약 27,000명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나온 전투이다. 미국은 4년간 이어진 태평양 전쟁을 끝내기 위해 1945년 3월 26일 함대를 집결해 일제히 바다에서 포격을 가한다. 집중 공격후 4월 1일 18만 여 명이 오키나와 중부 해안가에 상륙한다.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공격
그러나 섬은 너무 조용했다. 일본은 사전 정보를 남기지 않기 위해 섬의 주민들을 남부로 이동시켰고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군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이 가미카제 공격은 4월 6일 하루 일본 규수에서만 약 300여 대가 출격했다. 5월 25일까지 미군 전투함을 20여 척 침몰시키고 150여척을 파괴하게 된다. 세계사에서 가장 많은 가미카제가 동원된 전투가 오키나와 전투이다.
육상전에서는 상륙한 미군 일부는 남부로 진격했다. 일본은 옛 왕국의 성터였던 슈리성 중심으로 수 겹의 다중 방어선을 구축하고 진격하기 위해 붉은 선에서 계속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이었다. 일본군의 방어선을 하나씩 파괴하며 전진해야 했다. 이런 미군에게 지옥같은 또 다른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철혈근황대
당시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 중 아이들을 선발해서 총알받이로 썻다. 이런 아이들을 무기와 피로써 천황을 지키는 군대라는 뜻의 철혈근황대라고 이름을 붙였었다. 전투 중 이런 어린아이를 본 미군은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이런 미군의 심리를 이용한 일본은 소년병에게 수류탄 2개씩 보급하며 하나는 적에게 던지고 하나는 자결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총알받이로 사용된 예는 또 있었다. 일본군은 동굴에 숨을때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었고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전단지를 뿌려 오키나와 주민 색출을 하려 했으나 좀처럼 항복하지 않고 일본군과 함께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단 자살령
전선이 불리해지자 일본은 주민들에게 집단 자살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이렇게 집단 자살을 한 곳만 전쟁 중 30여 곳이 넘고 오키나와에 징집된 조선인 1만여 명도 일본군에 목숨을 잃었다. 포로로 잡히면 일본군의 정보를 누설할 가능성을 우려한 일본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1945년 일본은 5월 29일 슈리성을 점령한다. 오키나와 전투 사망자는 총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 약 1/4이 오키나와 주민이었다. 이 중 미군도 1만 2천여 명 전사했고 일본군은 6만 6천여 명 사망했다. 나머지 12만 명의 전사자는 오키나와 주민과 조선인이었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태평양 전쟁의 최악의 전투였다.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평양 전쟁은 끝이 난다. 그리고 미국의 주도하에 제정된 평화헌법/ 일본국헌법을 재정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은 방어를 명분으로 오키나와 주변에 미사일 부대를 배치하며 군사력을 동원하며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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