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같은 경우는 한때 광주사태라고 하다가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은 그 성격이 아직 규정되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4.3 사건, 4.3 봉기, 4.3 사태, 4.3 학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며 아직도 그 이름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 남로당(남조선노동당:해방 직후 남한의 공산주의 정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경찰과 군이 무장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 접수된 사망자 수만 1만 천여 명이고 4.3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는 약 3만 명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숨이 희생된 사건이다.
4.3 사건의 배경 (원인)
4.3 사건이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7년 3월 1일에 3.1절 기념행사가 제주 관덕정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곳을 경찰이 말을 타고 가다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러나 경찰이 다친 아이를 살피지 않고 그냥 가버리자 화가 난 군중들이 경찰을 뒤쫓으며 경찰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니 그 장면을 멀리서 본 다른 경찰들이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해 시민들에게 총을 쐈고 경찰이 쏜 총에 맞아 6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당시 경찰 중 상당수는 친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 군정은 해방 후에도 이 친일 경찰들에게 치안을 맡겨 왔던 것이다. 1946년 군정 경찰 간부 중 82%가 일제 경찰 출신으로 밝혀졌다 예외는 아니었다. 이 친일경찰은 해방 후에도 시민들을 괴롭혀왔던 터라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이 사건으로 3월 10일에 온 제주도민들이 95%가 참여한 유례없는 대규모 총파업이 시작된다.
당시 정부 입장에서는 이를 반란으로 간주해 제주도로 경찰과 군대 그리고 우익 청년 단체를 보낸다. 이에 불안해진 좌익과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과 군대가 들어오니 불안을 느끼고 1948년 4월 3일에 무장봉기를 한다.
그때는 정부 수립 전이어서 국가보안법이 없었기 때문에 남로당이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남과 북이 정체성을 제도적으로 선명이 하기 시작하였고 남한은 총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기에 좌익세력을 강력히 진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며 강경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사건이 심각해진 것은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에서 남한 전체를 통틀어 오직 제주도만 선거 보이콧을 하면서 이후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우익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급파해서 48년 11월부터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다. 전체 피해자의 80%가 이때 발생한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 지점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로 인정하여 총살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정말 사람을 그렇게 죽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산속에 숨은 무장대(좌익)와 토벌대(우익) 간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토벌대(우익)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무장대(좌익)를 돕고 있다는 가정 아래 대량 학살 계획을 세운다.
무차별 학살 현장
우익 토벌대는 집을 다 태우고 보이면 모두 죽이고 '관광 총살'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마을에 주민들을 다 모아놓고 총살을 시키면서 그걸 서로 보게 하고 이들을 피해 굴속에 숨은 사람들을 가스로 죽이고 낮에는 우익 토벌대가 밤에는 좌익 무장대가 내려와 죽이고를 이런일이 4개월간 지속된 것이다.
진술서에 적힌 그날의 잔혹한 기억
그날 남편과 조카는 미리 피신했고 나는 9살 아들, 3살 딸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설마 사람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불을 붙이는 군인들에게 무조건
살려 줍서, 살려 줍서
하면서 손으로 막 빌었어요. 그러자 군인들은 나를 탁 밀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픽 쓰러지자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쐈습니다.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나가버리자 우선 아들이 불에 탈까 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업었던 딸을 살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딸까지 총에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다리는 손바닥만큼 뻥 뚫려 있었습니다. 내 옆구리를 뚫고 나간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다리까지 부셔놓은 거였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의 진술
25세쯤 되는 임산부를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세 명이 총에 대검을 꽃아 찔렀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 하며 소리쳤습니다.
이러한 잔혹함으로 이후의 정부는 4.3 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했고 반 세기 이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다랑쉬굴 유해들
당시 민간인들은 토벌대를 피해 동굴에 숨어들었는데 다랑쉬굴에도 9살된 어린아이와 여자등 11명의 주민이 숨어있었다. 이곳에 밀짚에 불을 피워 동굴로 연기를 집어 넣어 11명 모두 독한 연기에 질식해 사망했다. 이 11구의 백골 시신들은 44년이 흐른 1992년에야 발견이 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진실 규명 없이 급히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무명천 할머니의 작은 집
1949년 1월 한창 토벌이 일어날 때 35세의 나이로 총을 맞아 턱을 잃은 할머니는 보상은 물론이고 다쳤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 그때부터 평생을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채 살아오셨다고 한다. 그렇게 50여 년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무명천 할머니의 집
▼ 4.3 사건 특별법 제정
▼ 제주 4.3 사건 선녀들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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