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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장사리 전투 = 장사 상륙 작전 (이명흠 대위가 찾은 문산호 학도병들 유해는? )

by 짱신나^^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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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1일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인천 상륙작전 나흘 전 9월 15일 대한민국의 운명이 이 작전에 달려있었다.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하여 수세에 몰린 국군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끝나는 전쟁이었다. 판을 뒤집는 한방의 작전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인천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으로 상륙해 북한군의 허리를 끊는 작전이었다.

 

당시 전황도


성공하게 되면 북한군의 허리를 끊을 수 있는 작전이었으나 너무 위험했다. 상륙작전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가는 것으로 뻥 뚫린 바다에 적군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희박했다. 

 

 

성동격서 작전
이에 맥아더는 작전 3일 전 군산에 연합군 전함이 집결시키고 함포사격을 시작했고 이에 북한군도 대응공격에 나섰다. 연합군은 바로 철수, 다음날 강원도 삼척, 연합군의 함포사격 개시, 반격 순간 다시 연합군은 철수한다. 바로 성동격서 작전으로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에 친다는 것으로 북한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장사 상륙작전 


부산항에서 커다란 배 한 척이 출발한다. 배 이름은 문산호였고 이 배에는 젊은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이 배에는 16살 중학교 3학년 이기일도 있었다. 전쟁통이라 군인이 한참 모자라 기차역 등에서 학생들을 모집했고 기일이도 자원입대를 한 것이다.  이 배의 또 다른 한 사람 19세 최대환도 있었다. 고향 친구 4명과 함께 자원입대했다. 이런 학도병들이 700명이나 문산호에 타고 있었다. 

 

문산호

 

문산호 속 학도병 
군인이면 군번줄을 가지고 있으나 학도병은 정식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군번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이들에 주어진 것이 유격대원증으로 이것이 군인이라는 유일한 증표였다.  이들은 약칭으로 명 부대라고 불렀다. 맥아더의 편지를 받은 이명흠 대위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지은 부대 이름이었다.  아직 어린 10대 소년들이라 전쟁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하하호호 배안에서 즐거워했다.  게다가 배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 무슨 작전 내용인지도 아무도 몰랐다. 오직 지휘관 이명흠 대위만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학도병들 모습

 

장사리 지형
영덕 해안에 상륙해서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작전 내용이었고 영덕 해안은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점령지였다.  선택지는 없었던 이것은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학도병에게 군복과 총을 나눠주는데 북한군의 군복이었다. 북한군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영덕군 장사리로 가고 있었다.

 

장사리 지형



장사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지형으로 북한군이 위에서 보고 있었고 북한군 핵심 김무정 군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작전목표는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200 고지를 탈환하고 7번 국도를 끊어 보급로를 끊는다. 또한 이곳에서 상륙작전이 시작되면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이곳이라고 추측하게 되고 인근 병력도 이곳으로 출동하게 되어 인천 상륙 작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도병들은 훈련을 2주만 받고 총 다루는 것만 겨우 배웠다. 그때 배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큰 배에 파도가 갑판을 덮쳤다.  파도가 너무 세서 멀미에 정신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도착도 하기 전에 다 죽게 생겼던 것이다. 이때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제출했고 부모님께 드릴 말씀도 적었다.

 

 

암초에 걸린 문산호

출항 10시간 후 장사리 해안 100M쯤 도착했고 대포소리가 들렸고 총알이 빗발치고 있었다. 내리기도 전에 북한군에게 노출된 배였다.  급히 배를 돌렸다.  그러나 배가 갑자기 암초에 걸려 꼼짝을 못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몰살 위기였고 이에 이대위는 전원 상륙 개시 명령을 내렸다.  대포와 총알이 빗발치는 그곳으로 맨몸으로 들어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리는 즉시 적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파도에 휩쓸려 배 밑으로 들어가 숨이 막혀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사리 전투

 

이때 문산호 선원들은 밧줄을 몸에 묶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헤엄을 쳐서 육지로 접근했다. 그리고 해안가 소나무에 밧줄을 연결했다. 학도병들은 밧줄을 잡고 해안으로 진출했다. 대포며 기관총이 빗발치는 그곳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총알은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200 고지 탈환

모래사장의 모래를 손으로 막 판 후 그 속에 들어가 총을 장전했는데 총이 바닷물에 젖어서 나가지가 않았다.  이때 뒤따라 오던 미군 호위함에서 지원 사격이 이루어지고 이때 대원들은 200 고지를 향해 뛰어갔다. 토치카를 사수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것을 잡기 위해 산을 엉금엉금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북한군의 토치카를 하나씩 잡으면서 계속 전진을 했고 작전 개시 12시간 만에 200 고지를 탈환한다. 그러나 주변은 처참했다. 사방이 시신이었다. 

 

토치카=전투용 진지

 

 

7번국도 차단 성공
다음날 아침부터 적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아직 남아있었다. 7번 국도를 차단해야 했다. 7번 국도에 다리가 2개 있었고 이 다리를 폭파했다.

 

7변국도 다리



작전 3일째 
북한군 병력이 전차까지 앞세워  총동원돼 몰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피해야 하는데 무전기, 배는 좌초되어 모든 것이 진퇴양난이었다. 이에 이 대위는 해안을 따라 남하해서 포항 인근의 아군 부대에 합류하기로 한다.  이렇게 부대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걷고 있는데 하늘에 헬기가 보인다. 대한민국 육군 헬기였다. 이명흠 대위는 직접 헬기를 타고 구조 요청을 한 후 부대로 복귀했다.  이들에게 구조선이 도착한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필사의 탈출
구조선은 내일 새벽 5시에 온다고 했고 하룻밤만 버티면 되었다. 그러나 구조선 도착 장소는 장사리 해안이었다. 이곳은 이미 북한군이 탈환한 상태였다. 그날 밤 학도병들은 풀숲에 몸을 숨기고 밤을 새웠고 드디어 새벽 5시 구조선이 보였다. 구조선에 문이 열렸고 구명정 2척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북한군은 아직 잠잠했다.  부상병부터 구명정에 태우는 그때 200 고지에서 기관총이 난사된다. 북한군의 공격이었다. 뒤이은 유엔군의 지원 사격이 있었고 전투기가 200 고기에 포탄을 퍼부었다. 이틈에 소년들은 구조선으로 돌진했다.  여기저기서 총에 맞고 쓰러진 사람들이었다.

 

당시 실제 사진

 

떠나는 구조선과 남겨진 학도병

이때  배로 박격포가 떨어졌고 갑판에서 죽은 소년도 8명이 있었다.  힘겹게 배에 올랐던 소련들이 바다로 튀어나가고  갑판 위는 온통 피바다였다.  그 순간 미군 소령은 명령을 내렸다. 배문을 닫고 철수하는 것이었다. 아직 못 탄 소년들이 많이 있었다. 

 

포로가 된 학도병들
이렇게 남겨진 30여 명의 소년들은 숲 속으로 뛰기 시작했으나 이들은 모두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천 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어 전세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었다. 장사리의 북한군들은 태백산맥을 따라 북한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포로가 된 소년들은 밧줄에 묶여 걷고 또 걸었다. 잠도 재우지 않고 열흘 낮밤을 계속 걸었다. 그러다 쓰러지는 포로는 총알을 아낀다고 대창으로 찔러 죽었다.

 

최대환 당시 19세

 

탈출한 학도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소년들은 탈출을 시도했고 대환이도 탈출을 해 남쪽으로 무조건 뛰었다. 그리고 군인을 만나게 됐는데 이들은 그들이 입은 인민군 군복 때문에 포로임을 믿지 않았다. 이때 처음에 받았던 유격대원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다시 전투에 합류해 전쟁을 했다. 이 소년들이 돌아온 것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후였다.  집을 떠난 지 3년 만이었다. 



이명흠 대위가 찾은 장사 상륙작전 기록은? 

 

장사상륙작전은 700명이 탑승했으나 몇 명이 전사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139명으로 추정된다. 실제 몇 명이 사망, 실종되었는지는 모른다.  탈출자 이외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행방을 알 수가 없고 애초에 작전 참여 인원이 몇 명 인지도 미상이었다.  알려진 숫자는 772명이지만 이것도 지휘관 이명흠 대위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이렇게 모르는 이유는 이 장사상륙작전은 극비 작전이기 때문에 작전명령서 빼고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장사 상륙 작전의 유일한 기록 작전명령서 174호



이에 이명흠 대위는 중령으로 예편된 후 직접 대원들을 찾아 나서게 되고 국방부에 참전자 명단을 요청했다.  기록이 없다는 답변서를 받았다. 그리고 이 대위는 30년 넘게 대원들의 행방을 찾아 헤맸고 그렇게 몇십 년에 걸쳐 명단을 만들었다. 

 

이명흠 대위 모습



학도병들의 유해는? 
그들의 유해는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유해 수습 건수가 0 명으로 전쟁 후에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좌초되었던 문산호는 전쟁 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다속 문산호 모습



1991년 문산호에 대한 탐사가 처음 시작되었다. 대원들이 방송국에 의뢰해서 침몰한 배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가 유해발굴에 나선 것은 1997년이다. 

바닷속 문산호에서 찾아낸 뼛조각

 

전쟁이 끝난 지 44년 만에 국가보훈처와 해병대가 희생자 유골 인양을 시도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다시 25년이 흐른 2022년 한번 더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역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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