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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꼬꼬무

일본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 이렇게 했다. 다음은 사도광산 ? (25)

by 365 ^^ 2022. 7. 30.

1943년 전라북도 익산 면사무소 말단 직원이 15살 최장섭의 집에 와서 다짜고짜 따라 나오라고 한다. 이렇게 모인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갑자기 일본 사람이 나타나 아이들을 일본으로 간다고 말했다.  일본에 가면 기술도 배우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했고 이렇게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한참만에 일본에 도착했는데 다시 배를 타라고 한다. 그렇게 목적지도 모른 채 계속 끌려간 사람들이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섬이 보인다. 그런데 섬이 좀 이상했다.

 

단도=하시마 섬

 

군함도 이야기 

 

이 섬의 이름은 단도 일본어로는 하시마 섬이었다. 크기는 야구장 두 배정도의 넓이로 엄청 작은 섬이었다.

 

작은 섬 크기



선착장 앞에 좁은 통로가 보였다. 그리고 앞에 영광의 문이라는 4글자가 보였다. 

 

다도의 입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엄청 높은 아파트, 병원, 학교, 극장 등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파친코까지 있었다. 그리고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1960년대 기준 인 구는 약 5200명이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아파트 지하, 일본인 노동자는 중간, 일본인 관리자는 상층에 살았다. 아파트는 철저하게 신분에 따라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헬멧을 나눠주고 지하 깊은 곳으로 끌고 갔고  그곳에는 석탄을 깨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이 섬이 바로 군함같이 생겼다 해서 군함도라고 부른다.  

 

군함도

 

이 섬에서 석탄이 발견된 것은 1810년이다.  그로부터 80년 후 미쓰비스 회사가 섬을 사들였고 이때부터 군함도 탄광을 운영했다.

 

전범 기업 미쓰비치



하시마 탄광의 단면도
석탄이 있는 곳까지는 수직 갱도를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서 탄차를 타고 수평으로 이동한 후  석탄층을 만나면 비스듬히 파 들어가는 것이다.  기본 경사 45도는 기본, 최대 60도까지 있었다.  이렇게 지하 1km까지 내려갔다.

 

탄도 내부 깊이



섬을 중심으로 갱도가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한해에 캐낸 석탄만 약 41만 톤으로 미스비씨의 보물창고였다.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갱도

조선인의 작업장은 가장 위험한 갱도의 끝부분으로 온도는 40도가 넘고 습도도 엄청나게 높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다.  훈도시(일본 남자의 전통 속옷) 하나 달랑 입고 일을 했다. 갱도 바닥에는 바닷물이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고 소금기 때문에 살이 짓물렀고 뭔가를 잘못 건드리면 가스가 터져 나오고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

 

갱도에서 일하는 조선인 모습



군함도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을 화장한 기록이 있는데 대부분이 압사, 질식사, 폭발사, 익사였고 1925년~1945년까지 이곳 군함도에서만 조선인이 12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정말 힘든것은 배고픔이었다. 당시 콩깻묵으로 만든 주먹밥 한 덩이가 다였다.  그것도 쥐가 와서 쌀만 먹고 콩깻묵은 쥐도 안 먹었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은 가죽 채찍으로 휘둘려 피가 튀고 살점이 묻어났다.  이 섬은 일본 본토와 4km 떨어진 곳으로 탈출이 불가능했고 어쩌다 탈출한다고 쳐도 반드시 잡히게 되어 있었다.

 



이 섬을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리를 자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리를 수레 밑에 넣는 사람들이 속속 생겼었을 만큼 그곳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이런 곳이 군함도뿐이 아니었다. 일본 내 조선인 강제노역 장소는 약 4300곳이나 있었다. 그렇게 끌려온 조선인이 약 102만 명이었고  당시 일본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니 일손이 부족했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 후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임금에 공제금을 넣어 일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공제금에는 작업복, 도구, 일본 올 때 뱃삯까지 모두 공제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제노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월급을 받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해가 가고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군함도에서 20KM 떨어진 곳이었다. 탄광작업은 즉각 중지되었고 군함도 전체에 전기가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본인 관리자가 조선인을 불러 모아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고 모두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해방은 됐는데 배를 내주지 않았다.  2주쯤 지나니 배가 왔다. 그리고 그 배는 나가사키로 갔고 뜬금없이 빗자루와 삽을 주면서 청소를 하라는 것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한 달도 안 된 위험한 곳에 조선인들을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그냥 데려온 것이다. 

그리고 해방된 지 3달이 지나고 그제야 통통배 3척 배를 내줬고 모든 사람들이 주저 없이 올랐다.  그러나 배들은 태풍을 만나 많은 조선인이 죽었다.  일본이 강제 동원한 조선인의 수는 일본에만 108만 명이였고 총 782만 명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우리나라, 일본은 물론이고 사할린, 남태평양, 동남아시아까지 끌려가서 고된 노력에 시달렸다.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

 

유네스코의 조건
2015년 일본은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을 한다. 일본은 이것이 자랑스러운 산업화 유산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는 거세게 반발을 했고 유네스코도 조건을 걸었다. 군함도의 전체 역사 강제노역의 역사를 숨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사상 처음으로 강제동원, 강제노역을 인정한 일본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믿고 세계유산 등재가 된 군함도이다. 

 

하루만에 말을 바꾼 일본

그리고 일본 정부는 단 하루 만에 말을 바꿔 FORCE TO WORK는 그냥 일하게 됐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후 군함도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 안내서에 따르면 강제동원, 강제노역은 없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화난다.정말로..

 

이에 군함도의 진실을 밝히려 피해자들은 직접 나섰다.  군함도에 끌려갔던 최장섭 할아버지는 기록을 남겼고 다시는 우리 후대 자손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사를 올바로 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최장섭 할아버지 기록



그리고 최근 일본은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겠다고 밝혔고  일제강점기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해 위험성이 높은 갱내 작업을 시켰던 곳이다. 사도 광산도 군함도와 같은 곳으로 수많은 조선인의 아픔이 서려있던 곳이다.  

 

사실 이 말을 듣고 있으면 답답하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포인트일텐데 행동하지 않고 주문처럼 이런 말만 되뇌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우리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싶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노력은 2022년 7월 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한번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노력을 할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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