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란?
의식+궤범(바퀴 궤, 모범 범)
조선 시대의 왕실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으로 이렇게 그림으로 남겨놓은 기록을 보고 그대로 다음 행사에 적용했다. 의궤를 메뉴얼로 삼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이 돌아가신 경우 이럴때 참고했던 의궤가 [국장도감의궤]로 관 담당, 의례담당, 손님접대 담당등의 기록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종류
왕실 결혼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 궁중의 잔치, 사신영접, 궁궐 건축등의 그시대의 가장 중요한 행사의 장면을 꼼꼼하게 기록한 기록물이다.
반차도
반차(나눌 반, 버금 차) : 차례라는 의미로 쓰이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으로 참가자 각 지위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늘어선 모습을 그린 일종의 리허설을 위한 그림이다. 그래서 반차도는 행사가 끝난 이후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행사전에 미리 그려놓는다.
현재 가장 오래된 의궤
조선초기부터 기록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6세기말 ~17세기 초 발생한 왜란과 호란때 대부분 소실되고 사라졌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0년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했을대 장례식과 관련된 의궤가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 수는?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등 현재 남아있는 의궤 수는 총 3931책이 남아있다.
어람용, 분상용 차이
프랑스로 약탈된 의궤는 어람용으로 왕을 그린 그림을 어진, 왕의 쓴 글씨 어필, 왕이 열람했던 어람용 의궤이다. 실록과 의궤의 차이는 실록은 왕이 본다면 사실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에 볼수 없으나 의궤는 총 5~9부 중 왕이 볼수 있도록 1부는 어람용으로 제작하고 4~8부는 분상용으로 제작해서 사고,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부서에서 보관하게 했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무엇이 다른가? (의궤의 가치)->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
프랑스는 왜 의궤를 가져갔을까?
조선 전기와 후기 의궤의 차이점
가례도감 중 가장 오래된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우리나라 가례도감 중 가장 오래된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으로 소현세자가례도감은 초기에는 왕비의 가마만 등장할 만큼 거칠고 소박하게 그렸다.
조선 후기 반차도
의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상, 하권 2책으로 제작하면서 반차도의 분량도 증가한다. 8면~18면에 걸쳐 그려진 초기 반차도인데 후기에는 46~92면에 걸쳐 그려지게 된다.
그림을 그린 사람
조선시대 그림그리는 사람이 전문적으로 있었는데 화원이라고 했다. 도화서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었고 신윤복도 화원 출신이었다.
의궤로 보는 조선 왕실 행사 대사례
국왕이 주관하는 활쏘기 의례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군신간의 화합을 도모한 의식이다. 조선 전기에 성종, 연산군, 중종 때 몇번 시행이 되다가 한동안 중지되었는데 영조때 대사례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 느끼고 200년만에 대사례를 부활시킨 영조였다.
1743년 대사례의궤 제작을 지시해 그것이 남아있다.
의궤 속 그림에는 임금을 그려넣지 않는다.
정조의 행차를 다룬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정조는 없고 말만 그려져 있다. 왕을 존엄하게 생각해 왕은 그림에 그려넣지 않고 왕의 어진을 따로 그려 특별하게 보관해 둔다.
1796년 정조의 효심과 정양용의 지혜로 만든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수원화성의 공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화성성역의궤] 가 있다.
수원화성과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유산에 지정된 이유)
1795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로 어머니와 나이가 같았던 아버지 사도세자도 살아있었다면 환갑이 되는 뜻깊은 해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을묘년 행차를 계획했고 그 기간 중 어머니 환갑잔치를 여는 것은 물론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봉수당진찬도 , 행차를 비롯한 8일간의 행사를 기록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화성원행도와 반차도로 알아보는 정조의 수원 화성행궁 회갑연 기록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