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핵개발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핵개발에 관심이 있었고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핵무기가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했고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심지어 원자로까지 들여왔었다. 같은 시기에 북한도 원자로를 들여왔는데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핵무기 대신 전기를 선택하게 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의미
박정희 대통령의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 이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다. 핵폭탄 코드명이 무궁화였다. 꽃이 피었습니다. 의 의미는 핵무기 개발의 성공을 뜻하는 의미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핵개발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1955년 한국은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북한은 소련이랑 체결을 했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위기에 처한 한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충격에 빠진다.
닉슨독트린을 발표한 이유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했고 그 중심에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1968년도와 1969년도 미국 상황은 한마디로 지친 상황으로 태평양 전쟁, 유럽에서의 세계 제2 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한국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그 후에 또 다시 1964년에 베트남 전쟁까지 하고 1975년 결국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다.
미국 패전의 요인은 '구정 대공세'라고 해서 북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공화국, 미국과 그 동맹국 군대에 맞서 1968년 1월 30일 개시한 작전으로 많은 젊은 군인들의 죽음을 미국 국민들이 지켜보게 된다. 그래서 1969년에 닉슨 대통령의 닉슨독트린을 발표한다.
한국의 국군도 베트남에 엄청난 5만명 병력을 파병한 상황에서 미군의 철수가 언급되다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불안한 상황이었다. 당시 북한 김일성은 미군만 없으면 남한으로 쳐들어 갈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던 시기였다.
미국의 뒤통수 치기
그래서 1969년 8월 급하게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미군 철수에서 한국만 제외한다고 답변을 받는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정상회담 1년뒤 1만명의 주한미군 철수 선포하고 그 다음달에 추가로 5년 이내 모든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지금과 달리 군사 군형이 무너지는 상황이었고 위스키급 잠수함은 구소련에서 북한이 수입해왔기 때문에 해군력 또한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국가의 생존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손편지를 써서 (친서)를 미국 닉슨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거기에 대한 답장에 배신감을 느꼈다.
미국 주한미군 7사단 철수
1971년 3월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 철수시킨 부대는 주한미국 7사단으로 인천상륙작전 당시 처음으로 인천에 상륙했던 주한미군 7사단, 9.28 서울수복(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을 한국군과 주한미군 7사단이 회복) 했던 그 부대였고 서해안 최전방에 주둔하고 있었던 부대, 개성에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는 부대였다. 그런 주력부대 7사단을 철수 시켜 버린 것이다.
박정희 핵무기 개발 계획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핵무기 개발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이에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를 파트너로 점찍는다. 프랑스도 원래는 핵이 없었으나 핵 개발을 고민하던 샤를 드골은 미국의 눈치에도 강력히 진행시켜 핵을 보유하게 된다. 당시 미국 주도로 더 이상의 핵 확산을 멈추자는 정책에 유일하게 대항한 서구 강국이 바로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1975년 대한민국과 계약서까지 작성하면 기술협력을 체결하게 된다.
플루토늄(핵무기 재료) 추출 기술 이전 계약을 1975년 프랑스와 체결했다. 핵탄두 1개 제작에 필요한 플루토늄은 약 7~8kg으로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핵탄두 제작이지만 이것은 발각이 잘 되는 단점이 있다. 북한이 영변 핵처리 시설 개발 및 가동했을 때 인공위성으로 미리 알고 있던 미국이다. 그래서 북한은 현재 농축우라늄을 사용해 개발하는 것은 시설 크기가 비교적 작아도 가능하기 때문에 숨기기 쉽다.
미국 한미협정 취소 선언
박정희 당시 핵개발을 눈치 챈 미국은 프랑스와 계약 체결 이후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서울을 방문한 후 한국-미국의 모든 협정을 취소할 것을 선언한다.
핵 확산 금지조약
미국은 일본에 핵무기 투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1968년부터 핵보유국 사이에서 논의 됐던 조약 핵확산금지조약(NPT) 맺는다. 핵 확산을 막기 위해 핵무기가 없는 나라는 핵개발을 하지 않는 것이고 대신에 원자력 기술 발전은 ok, 평화적 이용엔 핵보유국의 도움의 손길도 ok, 이미 핵을 개발해 가지고 있는 나라는 더이상 성능을 업그레이드 시키지 않는 것이다.
현재 핵 보유국가는? 원자폭탄 개발에 아인슈타인의 관여도 얼마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적인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탐냈다. 이휘소 박사는 (1935~1977) 노벨 물리학상 후보 반열에 올랐던 한국의 천재 물리학자로 이 당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사람들 압두스 살람과 스티븐 와인버그의 소감에서 이휘소 박사가 언급될 만큼 세계적인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박사였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허구 부분은?
이휘소 박사의 이야기를 쓴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이휘소를 모티브로 삼은 김진명 작가의 소설로 30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소설 원작으로 영화도 제작될 만큼 유명한 소설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핵개발을 하려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 문제는 소설의 허구적인 부분 이휘소 박사가 핵 개발 때문에 미국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나와서 이 허구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져서 유족들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휘소 박사는 42세에 교통사고로 인해 생을 마쳤다.
이휘소 박사를 섭외하기 위한 노력
박정희 대통령은 이휘소 박사를 섭외하기 위해 친히 편지를 써서 보낸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휘소 박사는 한국 물리학 발전에 이바지하는것에 찬성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도움을 줄수는 없다고 말한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을 둘러싼 부정선거 논란이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고 각 대학에 군대가 들어가게 되고 1972년 유신 헌법을 선포하며 독재정권이 탄생했다.
또한 이휘소 박사는 핵무기 개발 자체를 반대했던 사람이다. "핵무기는 언젠가는 모두 없어져야 하고 특히 독재자가 있는 개발도상국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된다" 고 말하며 박정희의 제한을 거절했다.
탄도 미사일 개발
핵개발을 하면서 함께 개발했던 것이 핵을 실을 수 있는 탄도 미사일 개발이었다.
프랑스의 핵기술을 전수받고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던 그때 주한 미군의 철수는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박정희 대통령도 핵 개발도 불사하겠다는 폭탄발언을 한다. 그리고 1978년부터는 핵무기를 가진다는 발언을 했고 이에 미국은 수출입 규제, 원자력 발전소 연료 공급 중단 등 한미 경제 관계를 끝내겠다고 강하게 압박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계속 밀고 나간다.
1976년 1월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에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하는 협박단을 파견한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핵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미리 미사일, 원료, 기술, 핵연료 농축등 따로 연구를 진행했고 각 연구팀이 서로를 알지 못하게 기밀로 진행을 했다. 그래서 미국이 전체적인 핵 개발 현황 파악이 어려웠다.
백곰 미사일 성공
1978년 9월 25일 안흥 유도탄 시험 기지 무려 7년을 투자해 만든 백곰 미사일이 성공을 이루면서 세계 7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된 한국이다. 백곰의 사거리 180km는 평양으로 날릴수 있는거리로 북한은 깜짝놀란다.
1977년 미국 39대 대통령으로 지미카터가 취임 사흘간 이뤄진 정상회담은 순조로운 듯 보였으나 지미카터 대통령은 한국에 핵개발에 강한 의심을 보이며 경남 창원에 대규모 원자로 생산시설을 직접 가보겠다고까지 했다.
핵무기, 미사일 개발 중단
1979년은 이미 대한민국 핵무기 개발이 88~95% 완성됐다는 분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에 의해 암살을 당하면서 핵개발은 중지된다. 12.12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이 이어받게 되지만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기에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상황이라 핵 개발 사업은 모두 중단되었다.
미사일 개발 제개
심지어는 핵 개발에 대한 자료를 미국측에 넘겨줬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1982년에 장거리 미사일 개발 또한 해체가 되었다. 그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1983년10월 9일에 버마 방문에서 테러를 당하면서 아웅산 묘소 테러를 당했으나 보복을 하려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탓에 죽어있던 미사일 개발을 다시 재개하면서 백곰 미사일을 개량해 지금의 현무 미사일로 완성되었다.
[출처 이만갑 5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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