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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장진호 전투 (미군 역사상 최장의 후퇴) /중국 영화 장진호 논란

by 365 ^^ 2022. 1. 20.

광복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그어진 38선을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넘어온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동의가 필요했고 스탈린은 남침을 반대하다가 1950년 4월에 승인하게 된다. 

 

스탈린이 남침을 허락한 이유 

 

(얄타회담,애치슨 라인) 6.25 전쟁 원인,전개 과정/38선 생긴 이유,원인 (=남북 분단 이유)

 

 

 

 

 

 

 

 

중궁군의 개입 

1950년 UN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7월 1일 미국 특수부대가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다. 그러나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첫 패배이후 낙동강 방어선까지 유엔군이 밀리게 된다. 미국은 북한을 과소평가했다가 자유 진영의 최후 보루이자 최대 전장까지 밀리게 된것이다. 이후에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 38선을 넘어 북진이 이루어지자 미국을 저지시키지 않으면 중국의 안전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중국은 참전을 결심한다.   

 

 

1950년 10월 19일. 한미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바로 그날 30만에 가까운 중공군이 출전을 하게된다. 당시 중국은 자국의 정규군을 보내면서도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 조직된 군대를 보내는 것처럼 의용군이라고 했다. 미국은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을 모르고 있었고 미국과 국군은 동시에 밀어붙여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10월 25일 평안도 운산(중국군과의 최초의 전투)에서 중공군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맥아더는 북진을 중단하지 않았다. 

 

 

장진호는 어떤 지역인가? 

강계 지역으로 진격 중에 당도한 개마고원의 장진호는 해발 1200m 산악지형에 둘어싸인 호수로 이곳은 지형도 험난하지만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한국전쟁이 있던 그해 겨울 최저 영하 40도의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 ~12월 11일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저수지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미 연합군(3만)을 중국군(12만)이 포위하며 벌인 치열한 전투였다. 이 당시 미 7사단, 미해병이 장진호의 동쪽과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중국 9병단 예하 12만 중국군이 포진하고 있었고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국군이었다.

 

 

11월 27일 중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장진호 전투는 3만여명의 미군이 포위된 체 사투를 벌이게 된다. 포위망을 뚫기 위해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나 이것은 낮에만 효과가 있었다.  낮에는 매복을 해있다가 밤 야간에 기습 공격한 중국군이었다. 이에 미 7사단은 얼어붙은 장진호를 가로질러 건너 후퇴하기 시작한다. 얼음이 깨지는 순간 전몰하게 되는 것이었다.

 

 

장진호 전투의 최대의 적 추위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 전투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는 모든 것을 얼려버린 얼음 지옥이었다. 중국군의 유인 후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미군은 이렇게 혹한의 전쟁터에서 싸워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 얼어죽거나 탱크에 몸이 붙어 얼어죽기가 일쑤였다. 이 혹한은 중국군에게도 큰 고통이었다.

 

 

제대로 된 솜 누비옷과 천 운동화마저 없이 맨발로 전투를 했고 미군의 사격을 피해 잠깐 엎드렸다가 하룻밤 사이에 전 중대원 동사 그대로 얼어죽은 부대가 너무 많았다. 지옥보다 더한 추위가 도사렸던 장진호 전투였다.

 

 

장진호 전투 피해

이 전투에서 유엔균, 중국군 총 피해는 전투 사망자 29,707명으로 추위에 얼아 죽은 사망자만 36,292명 이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반 군인과 민간인에게 전쟁의 승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스미스 장군의 결단

이때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철수 명령을 내린다.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항공기로 철수하라는 명령이었으나 스미스 장군은 미 해병 1사단은 걸어서 후퇴하겠다고 한다. 이 결정은 미 해병 1사단이 중국군과 전투를 하는 동안 다른 부대가 후퇴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이렇게 미 해병 1사단은 흥남 부두가 있는 함흥으로 걸어서 철수한다. 이때 후퇴입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말은 전쟁사에 유명한 명언 중 하나이다.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oliver P.Smith

장진호에서 흥남부두까지 110KM의 거리를 걸어서 이동한 것이다. 중국군에 포위된 채 유일한 탈출구인 흥남으로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황초령으로 건너는 다리(유일한 퇴로)를 중국군이 폭파하면서 1만여명의 병력이 고립된 상태가 된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수송기를 동원해 부교를 설치할 장비를 투하, 끊어진 다리를 복구해 탈출했고 12월 11일 유엔군이 함흥에 진입하며 마무리된 장진호 전투이다.

 

수송기를 이용해 부교를 설치할 장비를 투하
끊어진 다리를 복구하면서 후퇴

장진호 전투는 미군 역사상 최장의 후퇴를 기록한 전투이다. 중국군은 미 해병 철수를 막으려 했던 중국 제 9병단은 큰 타격을 입고 수개월 전선투입이 불가능했고 중국군의 공격에 미 해병이 집중적으로 희생되며 흩어졌던 10군단은 흥남으로 철수가 가능했다. 

 

이런 철수하는 유엔군을 뒤따른 북한 주민들 9만 8천여명의 피난민이 모여든 흥남부두였다. 

 

흥남철수 작전 (메러디스 호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흥남철수 작전 (메러디스 호에 탑승했던 사람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한 미 해병의 집중적 희생으로 흩어져있던 10군단은 흥남으로 철수가 가능해졌다. 철수하는 유엔군을 뒤따른 9만 8천여 명의 북한주민들 피난민이 흥남

jangane.tistory.com

 

 

 

중국 영화 장진호 논란 

중국이 영화 장진호를 개봉하면서 2021년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으로 중앙선전부가 2300억원을 투자해 만든 영화로 1950년 11월 장진호로 북진한 미 해병을 중국군이 포위 미 연합군이 퇴각하는 과정을 재연한 것으로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이다.

 

 

그러나 영화 장진호는 중국식 애국주의 시각이 드러내있다. 미군에 맞선 중국군의 희생이 부각되었고 북한의 남침과 유엔군 참전 배경은 빠져 있다. 영화는 개봉 5일만에 극장 매출 수익 4000억원을 돌파하며 중국전쟁 역사상 최고의 매출이라고 한다. 21년 12월 12일 기준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익 1조 812억 원을 기록했다. 

 

 

 

 

 

 

 

영화 장진호 논란

영화 <장진호>는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는 개봉을 허가했으나 말레이시아는 공산주의 선전이라고 하여 불허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중국이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돕는다)으로 규정한 것으로 한국전쟁의 주체인 남북을 빼고 한국전쟁이 마치 미.중전쟁인 것처럼 묘사를 했다는 것이다.

 

 

결말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이 미군을 꺽고 한국전쟁 최후승리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결말이다. 이 영화는 중국 중심의 왜곡된 역사관이 담긴 영화이다. 아편전쟁이후 연전연패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이었는데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중국 국경을 위협하는 미군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중국이 최초로 서양과 대등하게 맞선 전쟁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장진호 영화 열풍으로 일어난 중국인의 애국주의

 

현재 중국은 국제 사회의 비판과 제재에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고무시키고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한 선전영화이고 또 하나는 북한에 보내는 시그널로  한반도 갈등에 항미원조 정신을 계승 암시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중국군의 사망자 수가 3배나 높다. 미국에게 영토를 내주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일지 모르나 이 전투를 계기로 중국의 열악한 군사력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었고 소련의 적극적 개입 거부로 인해 중국이 고립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1971년 유엔가입, 1979년 미중 수교 전까지 국제 사회에서 침략국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큰 인명 피해와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가져온 전쟁이었다. 

 

 

 

 

상감령 전투 (중국의 첫번재 항미원조 영화)

중국은 영화 장진호 말고도 다수의 역사왜곡 영화를 만들었다. 첫번째 항미원조 영화로 1956년작 <상감령> 있다. 이 영화는 세계 최강 미군에게 승리한 전투로 선전된 첫 번째 항미원조 영화인데 강원도 철원 오성산 일대에서 6주간 벌인 공방전으로 정전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지전이었다. 삼각고지는 중국군이 저격능선은 유엔군이 장악했던 전투이다. 

 

최근 화웨이 회장의 발언으로 상감령 전투가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amp;nbsp;

[차이나는 클라스 2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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