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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수원화성과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유산에 지정된 이유)

by 365 ^^ 2020. 9. 6.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7,38회 중]

출연자: 설민석 

 

 

 수원 화성

 

수원화성을 만든 이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극적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무덤도 제대로 조성이 되지 못했다. 이를 안까갑게 여긴 정조는 1762년 양주 배봉산 아래 조성했던 (서울시립대 자리) 아버지의 무덤을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수원화성 쪽으로 이전을 한다. 무덤 자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시켜 관아와 민가를 옮겨 새롭게 조성하고 신도시 수원화성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수원화성은 정조가 만든 최초의 신도시이다.

 

수원화성은 수원 팔달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1794년 ~1796년 정조 때 만들어진 신도시로 임금이 머무는 화성행궁이 있는 곳이다. 성곽 둘레만 5.7km 이다. 
 
화성행궁

 

수원 화성은 성문, 각종 방어 시설을 갖춘 군사 요새로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파손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복원 197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원화성의 정문  
장안문 (북문)
'장안의 화제'는 옛 중국 수도 장안을 뜻함 

 

북문이 정문인 이유

보통 궁궐의 문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수원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그 이유는 임금이 서울에서 오는 방향이 북쪽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은 본래 신도시로 만들기 전에는 가옥이 6채 있었다. 거의 황무지였던 이곳에 구읍에 살고 있던 민가 200여 호를 이주 비용으로 총 10만 냥을 쾌척 현재 가치 약 70억을 보상금으로 나눠주고 이주 시켰다. 게다가 10년 간 세금 면제와 나라에 갚아야 하는 환곡 이자를 3년 치 탕감해주었다. 

 
수원화성의 특징 

 

우리나라의 방어 시스템은 읍성+산성에 기반을 둔 방어 시스템인데 이것은 문제가 많았다. 평소 생활 터전을 둘러싼 읍성은 도시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얕은 담장 때문에 대규모 전란에는 방어 능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인근 산성으로 대피 하는 것이 방어하는 법이었다. 

이러한 읍성+산성의 성곽 제도는 전쟁 후에는 읍성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상당히 문제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읍성과 산성의 장점을 융합한 요새화 된 신도시 수원화성을 만든 것이다. 100M 마다 48개 소의 공격 방어 시설 있다.

48개의 공격방어시설

숨어서 적을 감시하고 포를 쏘는 등 다양한 성벽 방어 시설을 체계적으로 배치한 수원화성이다. 

 

성곽은 돌로 쌓아 올렸고 외성은 벽돌로 쌓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대포를 맞았을 때 와르르 무너지는 반면 외부 충격 흡수가 뛰어난 벽돌로 쌓으면 대포를 맞은 부분에 구멍만 나기 때문에 그 부분만 교체하면 된다. 그래서 앞으로 나와 있고 전쟁 시 가장 취약한 부분인 성문 외성은 벽돌로 쌓은 것이다. 

 

또한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 외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 밖의 세로 밖의 기다란 홈은 현안으로
현안

 

성벽 가까이 다가온 적을 끓는 물이나 기름을 부어 공격하는 것이다.  

 

장안문 위 5개의 구멍은 오성지 

성문에 불이 났을 때 물을 부어 불을 끄는 소화전 역할을 한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도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직선 도로로 만들었다. 

당시 읍성은 주로 관청이 북쪽에 있었다. 서울도 경복궁 앞 종로처럼 동서로 길을 냈었다.

 

왕이 북쪽에 계시기도 하지만 남북으로 이동해서 한양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물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계획 하에 남북 도로를 내고 수원 화성을 지은 것이다. 
 
방화수류정과 용연
 
수원화성에는 각 방향으로 4개의 각루가 있다. 성에서 높은 구릉을 선택해 그곳에 누각을 만들어 주위를 감시하고 휴식도 취할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다.  그 중에 동북각루에 속하는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손꼽힌다. 
 

방화수유정 아래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용머리 바위 이름을 따 용의 연못, 용연이라고 불린다.  

방화 수류정은 감시가 용이한 위치의 군사 지휘소이자 휴식을 위한 정자를 말한다. 

방화수류정의 뜻은 꽃을 찾고 버들을 찾아 노니는 곳 

 

 
 
 
정조의 애민정신
 
조선시대 16~60세 양인 남성에게 부과되던 백성의 의무가 있다. 
 
  1. 군역- 군대 갈 의무 
  2. 요역- 국가 사업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
수원 화성 성곽 둘레는 5.7Km로 일 년에 70만 명씩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에 원성이 자자했을 법한데  정조는 백성들에게 품삯을 지급했다. 그것도 내탕금=임금의 사유 재산으로 지급했고 공사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에는 병원에 입원 시키고 일당 50% 지급까지 했다. 
 
 
화성성역의궤 
 
 
1794년 (정조 18년)에 시작된 수원화성 공사는 공사 기간 2년여 공사에 투입된 인원만 연 70여만 명, 공사비는 80만 냥에 이르는 거대한 공사(지금 시세400억정도) 였다. 당시 한양으로 대략 쌀 20kg를 구매했었다. 한냥은 지금의 약 4~5만원 , 한푼은 한냥의 1/100이다.  한푼은 400~500원 정도
 

공사기간을 5년으로 예상했으나 약 2년 반 만에 완성한다. 그 이유는 당대 최고의 과학기법이 동원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사 참여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했다. 일한만큼 돈을 지급했기 때문에  1794년 1월 공사 시작해서 1796년 9월 공사완료가되고 공사 전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남아 있고 활자본으로 여러 권을 찍어내어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도 많은 10권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수원화성을 축조 시 건설 과정 및 장비, 모든 장인의 이름까지 모두 기록한 화성 축조 공사기록으로 석수부터 미장까지 무려 1821명의 명단까지 다 적혀 있는 기록이다. 
 
화성성역의궤 실명을 모두 기록했던 이유는 책임소재를 밝히기 위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명단에 실제로 김쌀노미, 박복돌, 최큰노미 등등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화성의 4대문에 구역 별 성벽에 감독의 이름을 새겨서 책임 의식을 고취시켰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책임 소재 ㅎㅎ

 

수원 화성 건설 속 과학
 
수원 화성은 예상보다 빠른 2년 9개월 만에 완공이 되었고 그것은 2/3 이상 단축된 셈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화성축조가 가능했던 것은 그 당시 과학 기술을 보여주는 정약용이 발명한 장치들이 도움이 되었다.
 
 
♧유형거 
 

무거운 물건을 나을 때 사용하는 손수레의 일종으로 정약용이 만들었다. 

 
화성 성역의궤에 몇대가 투입되어 몇대가 남았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어서 남아 있지 않고 파손된 것은 많이 사용한 것이라고 본다. 10대가 투입되어 1대 만이 남은 유형거는 이것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다.
 

일반수 레의 바퀴보다 위에 짐 싣는 부분을 만들어 물건이 바퀴에 걸리지 않게 했다. 

 
♧녹로
물체를 높이 들어 올릴때 사용하던 기계 
녹로의 실제크키는 약 11m 
녹로는 오늘날의 지브크레인과 같은 역할

 

 

♧거중기 

정약요의 발명품 거중기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거중기로 정약용에 의해 발명되었다. 정조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5000권 이상의 수많은 책 중 16세기 서양 기술 수많은 장치들의 그림과 그 원리가 적힌 <기기도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정조는 그 책을 정약용에게 건네주고 <기기도설>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 바로 거중기이다.  거중기의 실제 활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실무에 쓰이는 기계의 중요한 점은 고장이 잘 나지 않고 단순해서 많이 쓰는 기계가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거중기의 경우 복잡한 구조의 장치로 좌우 이동이 어렵고 위 아래 이동만 가능해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려 수레에 얹는 용도로만 사용됐을 거라 예상된다.

 

1대가 투입되어 1대가 남았던 것으로 보아 실용적인 측면이 아쉽다. 

 

 
거중기 발명의 의의 
 
거중기는 조선 시대 실학의 상징으로 획기적인 장치였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 서양권에서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였으므로 18세기 당시 기술적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로서 거중기의 기술력보다는 실학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고 근대화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상징성이 큰 거중기이다.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이유
 

사실 수원화성은 파손된 성곽을 새롭게 재건축한 것인데 원래 재건축된 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유산으로 배제가 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수원화성이 지정된 이유는 수원화성 축조에 관련된 모든 정보가 기록된 <화성성역의궤>덕분이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 당시 그대로 재건축된 문화유산이라 판단되어

 

유네스코에 등재가 가능했고 <화성성역의궤> 야 말로 과학적인 기록으로 기계 설비부터 사람들의 임금까지 모든 것이 기록된 현장건축 기록물이자 과학 실험 노트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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