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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화성원행도와 반차도로 알아보는 정조의 수원 화성행궁 회갑연 기록들

by 365 ^^ 2020. 9. 5.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7회]

 

오늘의 탐사지: 수원화성

주제: 정조의 효심, 정조의 8일간의 행차

출연자: 설민석, 구구단 김세정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가는

8일간의 여정 

 

1795년 정조 재위 13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맞이한다. 혜경궁 홍씨는 단 한 번도 남편 사도세자가 잠은 곳에 가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아버지가 묻힌 수원에서 열어드리기로 한다. 
 
 
 

수원에는 정조가 건설한 신도시 화성이 있고 신도시 화성 안에는 성곽 화성(=수원화성)이 있다. 수원 화성 안에 왕이 머무는 화성행궁이 있다. 수원 옆 경기도 화성시에는 사도 세자의 융능이 있다.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총 13번의 수원 행차를 나섰던 정조였으나 평상시 행차와는 달리 이때의 화려한 행차는 장장 8일에 걸쳐 진행된 축제 퍼레이드와 같았다. 
 
 
정조 재위 13년 
수원 행차의 이유는?
 
첫 번째 왕권 강화 8일이나 왕궁을 비울 수 있다는 자신감 표출 .
 
두 번째 어머니 회갑잔치를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고 두 분 모두를 위한 회갑 잔치였었다.
 
세 번째 직접 백성들의 민생을 살피고 소통하고자 했다. 
행차 중 백성들의 접근을 막지 않은 정조는 직접 민생을 살피고 소통하고자 했다. 또한 이때 수원의 죄수들도 특별 사면으로 다 풀어 주고 3년에 한번 치르는 과거 시험이지만 특별 과거 시험도 실시했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군사 훈련까지 실시 -전시에 이뤄지는 군사 훈련이 아닌 축제 같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였다.  
 
이런 8일간의 축제 같은 행사 내용들이 화성능행 반차도와 화성원행도 8폭 병풍에 담겨져 있다. 
 
 
왜 8일의 행차?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기간이 8일이었다. 하나하나 모든 것에 의미를 둔 정조였다.

 

 
화성행차를 그린 
<정조 반차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된 46m 길이의 그림 화성 원행 당시 궁중의 각종 의식 장면과 늘어선 관원들의 배치 상황을 정확히 묘사한 그림이다. 김홍도와 김득신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2년 여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속 사람은 6000여명에 말은 약 1481필이 그려져 있다. 행차 비용만 10만 냥 -현재 가치로 약 70억 원으로 혜경궁 홍씨의 가마만 약 2,785냥 현재 가치 2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이 반차도 46M 그림이 청계천 벽에 쭉 그려져 있다. 

 

그림에 정조 대왕을 그리지 않았다. 왕을 그릴 수는 없기에 말과 양산으로 정조의 위치를 표시했다.
 

 

 

 

원행 1일차

 

1795년 윤 2월 9일 창덕궁에서 출발해서 숭례문을 지나 배다리가 설치됐던 곳인 노량진까지 도착한다.  
 

 

창덕궁에서 시작해서 수원화성을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다리 설치가 필수여서 정조가 정한 곳이 노량진이었다.

 

 

 
 
배다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 배를 서로 엇갈리게 배치한 후 그 위에 뼈대가 되는 소나무 기둥(보)를 설치 
  2. 널빤지를 이용해 평평하게 만들었던 교배선 
    그전에는 77척의 배를 활용해 배다리를 만들었지만 정조는 비용 절감을 위해 36척만을 이용해 배다리를 설치할 수 있게 설계를 했다. 
비용절감을 위한
배다리 설계도 조건    
 
▷지형 (수심, 물살) 
▷좁은 강폭이 중요
강폭이 좁아 배를 줄이기에 안성맞춤 배다리 
▷아치형 모양으로 설계
 
건너기 좋고 무게도 잘 견디게 배다리를 아치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가운데 높이가 가장 높은 배를 가운데에 배치
배다리 설계자는 다산 정약용(1762~1836)

 

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실어 나르던 세곡선을 렌트하는 대신 무역의 이권을 지급한다. 

 

이렇게 비용과 인력을 절감해 배다리를 설치했다.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 240척의 난간선을 따로 설치했다. 배다리는 당시 과학 기술과 예산을 낭비하지 않는 정조의 철저함과 애민정신 등을 엿볼 수가 있다. 정조가 선택했던 배다리 설치 장소에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다리 한강철교가 설치된다. 

 

 

 

정조 행차 로드 
 

창덕궁-숭례문-노량진 배다리 -시흥 행궁(1일)- 안양- 군포- 수원 화성행궁 2일 차 저녁 쯤에 도착한다. 

 

 

 
 
화성원행도 8폭 병풍
 
8일 동안 진행된 화성 행차 기간에 중요한 행사만 그림으로 남긴 화성원행도 8폭 병풍이 있다. 김홍도를 비롯한 당대 최고 화가들이 참여하여 그린 그림이다. 
 
 
 
원행 2 일차 
 
둘 째날에 수원 화성행궁 도착한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장안문을 통과해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장안문에서 도보 10여분 거리의 화성행궁이 있다. 

 

화성행궁

 

행궁 앞 3그루 나무 
정조 때부터 지금까지 약 230년 동안 자리를 지킨 나무들

 

 
정조는 정약용을 통해 아버지 사도세자 이야기를 듣게된다. 온양행궁에 머물던 사도세자가 행궁 앞에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를 심을 때  한자 '품' 자 모양으로 심게 했다. 
 
영의정,좌의정, 우의정을 뜻하는 나무 3그루

 

삼정승이 모여 어진 정치를 하라는 뜻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을 이어받아 똑같이 나무를 심은 정조
 
신풍루 

 

원래는 진남루였는데 정조가 신풍루로 변경한 것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은 풍패를 제 2의 고향 이라고 불렀는데 한나라는 중국 문화 융성의 시작으로 가장 빛나던 역사였으니 정조도 화성을 '새로운 풍패'(=신풍)로 삼고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것 아버지가 계신 화성을 새로운 고향으로 여긴 것으로 추측된다. 
 
원행 3일차 

 

 

원행 3일차로 새벽 5시에 정조가 향한 곳은 향교로 그 곳에서 배향(제사)을 지낸다.

명륜당을 둘러싸고 있는 문무백관들

 

 

향교란? 
 
조선시대 지방에서 유교를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공립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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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점의 정체는 호피무늬로 왕실에서도 귀한 물건이던 호랑이 가죽 방석

 
원행 6일차

마지막 날에는 정조가 낙남헌에서 노인들을 초대해 양로연을 배푼다. 이날도 회갑연 만큼이나 많은 노인들이 왔다고 한다. 
 
제4폭 낙남헌양로도

 

낙남헌 앞마당에는 양로연에 초대된 화성지역 노인들 

 

그 아래는 즉석에서 양로연 참석이 허락된 노인들

 

이날 정조는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을 배급하고 죽도 만들어 먹이도록 했다고 한다. 자신의 죽도 내어오라고 명령했는데 혹시나 백성들이 냉죽을 먹게 되진 않을까 염려하는 정조의 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원행 7,8일차 
 
궁으로 돌아가는 간다. 

 

 

수원화성과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유산에 지정된 이유)

 

수원화성과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유산에 지정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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