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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일대기

by 짱신나^^ 2021.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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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rgin Queen Elizabeth I 

영국의 유명한 3대 왕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 세, 빅토리아 여왕이 있다. 그 중에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조로 튜더 왕조는 거칠고 터프하기로 유명하지만 작은 섬나라였던 영국을 강대국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 여왕으로 유명하다. 그녀가 착용한 장식품 중에 진주 목걸이가 눈에 띄는데 진주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초상화를 많이 남긴 왕으로 유명한데 초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진주이다 .

 

 그림의 배경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최고의 업적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태어난 16세기에는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여성의 몸으로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엘리자베스 1세는 여왕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는 6번이나 결혼한 헨리 8세로 엘리자베스는 두번째 부인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국교를 바꿔가며 결혼을 했으나 결국 앤블린은 처형당했다. 그후 매번 새로운 엄마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엘리자베스지만 그녀들은 모두 죽거나 이혼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 과정에서 권력의 핵심은 국왕에게 있음을 배우게 된다.

 

이 그림은 죽기 8개월 전에 그린 그림으로 헨리 8세는 딸들도 왕이 계승이 가능하도록 법을 고쳐놓았다. 그림 속에는 결국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게 된 메리와 엘리자베스였으나 남동생 때문에 권력에서 밀어난 두 딸의 모습을 볼수 있다.

헨리 8세 이야기 자세히 보기

 

영국 헨리 8세의 여인들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스캔들을 남긴 튜더왕조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의 이미지는 심한 여성편력이 있는 포악한 바람둥이로 6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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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6세->메리 1세 왕위 계승 

헨리 8세가 죽은 후 9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는 왕이 되고 7년만에 갑자기 사망을 한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이 있는 메리 1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메리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국교를 가톨릭으로 바꾸고 엘리자베스 1세를 런던탑에 가뒀다. 아버지 헨리8세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를 만들었고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영국 국교회에 호의적이었다. 이에 반란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런던 탑에 투옥된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살아남기 위해 가톨릭 신도로 위장하며  언니인 메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메리는 너무나 임신을 원한 나머지 상상임신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우울증과 건강 악화에 시달리다 결국 심한 감기를 앓다가 메리는 죽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 왕위 계승 

이렇게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왕위를 계승하게 된 엘리자베스 1세의 나이는 25살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헨리 8세 밑에서 살아남았고 자신을 견제하던 이복 언니 밑에서도 살아남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준비된 왕이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엘리자베스 1세였다.

 

미국 버지니아 주(Virginia) 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주로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친다는 의미

 

엘리자베스의 재능

엘리자베스 1세는 13살 무렵 외국어 책을 번역할 정도로 언어능력이 탁월했다. 실제도 6개정도의 외국어를 구사했고 외국 대사를 만나면 그 나라 언어들로 대화를 했고 스트레스 해소방법 또한 외국어 책 번역에 몰두했다. 청소년기부터 60대까지 그녀는 왕성한 번역가로 활동했다.

 

 

왕위 계승 후 사회 상황

그녀는 자신의 성별이 자신 특권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고 말하면서 다양한 능력을 통해 여성 군주라는 편견을 깨기 위한 노력을 했던 엘리자베스 1세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에 오르면서 종교 갈등과 불안한 경제 상황과 직면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즉위 당시 사회 모습을 묘사한 글

 

엘리자베스의 정치 전략 3가지

 

 

유연한 종교정책

당시 영국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세력의 갈등이 심각했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교를 자극하지 않는 방법으로 개신교 신학을 바탕으로 영국 국교회를 확립했지만 아직 가톨릭이 익숙했던 대다수 국민을 배려해 가톨릭 의식은 그대로 남겨두면서 양쪽을 모두 포용하면서 종교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경제 위기 극복

엘리자베스 즉위 당시에 영국에 물가는 폭등했다. 아버지 헨리8세가 전쟁을 위해 발행한 이물질이 섞인 주화 때문에 화폐 가치는 바닦까지 떨어져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상황에서 엘리자베스의 해결책은 이물질 섞인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해주는 정책을 펼쳤고 당시 가치 약 7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2500억 원의 돈)를 회수할수 있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 해결책으로 끊임없이 국내의 생산 시설과 상품공급 확대에 힘을 썼다. 제조업을 장려, 육성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미지를 이용한 통치 전략

하루빨리 결혼을 하라는 청원에 대해 엘리자베스 1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평생 결혼하지 않고 처녀 여왕의 삶을 유지한 엘리자베스 1세였다. 이런 처녀여왕의 이미지를 활용해 통치 강화에 사용했다. 

 

그것은 초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펜던트 속에 불사조를 넣어 영원한 왕조를 의미했고, 담비 초상화에서 담비는 순백과 순결을 상징하는 동물을 그려넣었다.

 

체는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처녀성을 상징, 또한 군주의 분별력과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수많은 구혼자들이 있었다. 스페인왕, 신성로마제국의 대공들, 스웨덴 국왕, 오스트리아의 대공, 러시아의 짜르까지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구혼자와 처녀 여왕 이미지를 외교 전략에 사용한다. 

 

제일 먼저 구혼한 사람은 언니 메리의 남편이자 자신의 형부 펠리페 2세였다. 그러나 결혼에 확답을 주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런 애매한 태도는 다른 구혼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알랑송 공작, 앙주 공작과 10년간 결혼 협상을 끌어간다. 이것은 스페인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었기에 결혼 협상을 외교적 전략으로 사용했고 약점을 극복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혀 나갔고 영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엘리자베스는 왜 해적과 손을 잡았나 ?

 

 

해적 여왕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해적과 인연이 깊다. 멕시코의 산 후안 데 울루아는 지금의 베라크루스 지역으로 1568년 영국의 한 선단이 폭풍우로 파손된 배를 정비하고자 산 후안 항구에 정박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스페인 함대를 만나게 된다.

 

조력자 프랜시스 드레이크

영국과 스페인은 평화 조약을 맺고 있는 상태으나 스페인 함대가 약속을 깨고 영국선을 기습한다. 스페인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영국 선원들은 6척의 배 중 2척만이 항구를 탈출하게 되고 영국 선원들 200여 명이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한다. 이때 살아 남은 전설의 해적왕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최고의 파트너가 될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있었다.

 

영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 중 한사람으로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달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 공격해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스페인에 복수하리라 생각하며 스페인 선박을 주로 공격하고 스페인 식민지까지 공격하게 된다. 파나마의 스페인 보물 창고를 약탈 , 페루의 은광 행렬을 기습하는 등 스페인에 막대한 피해를 주면서 스페인에 복수를 하게 된다.

 

이에 격노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외교적으로 항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에게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약탈 허가증을 발급한다. 

 

사략 허가증 합법적으로 약탈을 허가하는 문서로 17세기부터는 국가에서 허가 받은 해적과 아닌 해적이 공존하는 '버키니아의 시대' 가 도래하고 그 이후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이 등장하는 17세기 후반부터는 무차별적 약탈을 감행하는 점점 악랄해지는 무법자 해적들이 등장한다.

 

스페인은 스페인 무적함대 

당시 스페인은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라는 최강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571년에 스페인 함대는 아시아를 넘어 지중해를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 함대를 격파하는 레판토 해전(1571.10.7) 후 무적 함대라는 별칭을 얻게 되면서 무적함대를 이용에 중요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은 카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었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영국의 국교를 개종시키고 속국으로 삼으려고 했던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해적을 이용했던 것이다. 1577년 12월 엘리자베스 1세는 세계 일주를 앞둔 드레이크 배에 승선한다.

 

스페인 '카카푸에고 호' 약탈

엘리자베스 1세와 드레이크 공동의 목적은 스페인 함선 공격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1577년 12월 13일 5척의 선단을 이끌고 플리머스 항을 출발 스페인이 했던 것처럼 영국도 대항해를 시작한다. 지금의 페루지역을 지날때 마닐라로 가고 있는 스페인 무역선의 정보를 입수하고 에쿠아도로 지역에서 스페인 선단 '카카푸에고 호'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이 배에는 은 약 26톤, 화폐 장식품등의 보물 상자가 약 13개 엄청난 양의 금은 보화가 가득한 배였다. 이것을 옮겨 싣는데만 6일이 걸릴정도였다.

 

 

 

이후 1년 7개월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의 스페인 대사는 ‘드레이크가 약 150만 페소에 달하는 보물을 약탈했다’고 보고했고 스페인은 이를 엘리자베스 1세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니 엘리자베스는 다시한번 드레이크 배에 승선한다.

 

이때 결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프랑스 대사가 왔었고 함께 배에 승선한 후 엘리자베스 1세의 부탁으로 기사작위를 주는 행위를 프랑스 대사에게 요청하며 프랑스 또한 드레이크의 행위를 암묵적으로 지지한다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프랑스 대사를 기사 작위 수여식에 참여시킨 모습

 

스페인 펠리페 2세 영국 침공계획 

이에 펠리페 2세는 자존심이 심하게 상하게 되고 1582년 영국 침공을 계획하지만 당장 실행할 수는 없었다. 빈번한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웠던 스페인은 당장 영국을 침략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하고 있었고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엘리자베스 1세가 지원을 하게 된다. 이에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1586년 3월 스페인은 영국 침략에 대한 교황청에 지지요청을 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 암살 사건

그 와중에 영국내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암살 사건이 일어난다. 영국 내부의 반란 모의가 진행되고 암살 계획이 적힌 편지까지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였다.  

 

메리는 가톨릭 신자로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는 5촌 관계였다. 메리는 국가는 다르지만 같은 왕가의 핏줄로 테어난지 6일만에 스코트랜드 여왕이 되었고 17살때 프랑스로 시집가서 왕비로 지내다가 남편 사후 스코틀랜드 여왕자격으로 귀국 후 다시 나라를 통치하게 된 인물이다.

 

메리가 프랑스로 시집 간 사이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스코틀랜드의 많은 귀족과 신하들이 개신교로 바뀐 것이다. 이에 메리 스튜어트는 5촌 관계의 친척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에게 망명을 오게 된다. 망명 이후 메리는 영국내 가톨릭 세력의 중심이 되면서 메리를 여왕으로 만들면 영국을 다시 카톨릭 국가로 만들수 있다는  영국 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사실 메리는 여러번 반역 음모에 연루가 되었고 실제로 몇번은 가담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친족이라는 이유로 처형을 거부하고 메리를 보호했다. 그러나 결국 메리는 처형을 당하게 되고 가톨릭 여왕 메리의 죽음으로 가톨릭 세력은 분노하며 교황도 공개적으로 메리의 죽음을 추모했다. 이를 계기로 스페인도 영국과의 전쟁 명분을 갖게 된다.

 

 

 

 

 

 

 

 

 

스페인의 침략

1588년 5월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해안가에 모습을 드러낸다.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 함대는 쳐들어왔고 여기에 맞선 영국함대는 드레이크에게 영국 해군 부총사령관을 제안한다.

 

스페인 군대 규묘

 

칼레 해전 (1855년)

해협을 진입하며 3번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칼레 해전때  합류 계획이던 스페인 육군 파르마 공작과 연락 두절이 되면서 스페인 함대는 그곳에 머물게 된다. 이때 영국이 쓴 작전은 바로 화공으로 배에 피치, 유황, 타르 화약등 발화성 물질을 가득 채우고 그대로 적진을 향해 돌격해 적의 배를 격파했고 혼란에 휩싸여 대열이 무너져버린 무적함대였다.

 

칼레 바다를 불태운 화공선의 위력
화공작전을 할때 바람이 중요했고 신의 선물처럼 바람이 적절히 불어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수 있게 되어 이 바람을 ‘개신교의 바람’이라 부른다.

 

무적함대는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대열을 정비 중이었는데 영국 함대 revenge 호에 드레이크가 등장한다. 무적함대의 전술은 초승달 대형으로 적의 함대가 가까이 오면 적 함대를 초승달 모양으로 포위해서 갈고리를 던저서 적함을 끌어 당긴 후 수많은 보병이 총, 칼, 대포로 적함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도 승리한 무적함대의 강력한 전술이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스페인함대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해를 줄 수 있는 최적의 포격 거리를 계산해 최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포사격을 퍼붓는다.양국 모두 전력을 다한 해전에서 스페인의 아르마다의 초승달 대형은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3~5척 정도의 군함이 완파당했고 다수의 배가 심각한 파손당했다.

 

이때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 상륙을 대비해 템스강 하구 틸버리에 집결해 있었는데 갑옷을 입은 여왕이 병사들에게 외치며 연설한다.

 

 

칼레 해전 이후 

 

칼레 해전 이후 본격적으로 식민지 점령에 나섰고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는 등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영제국의 시작을 알리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시대의 편견을 이겨내고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여왕으로 남아있다. 현재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직계는 아니지만 먼 틀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의 후손에 속한다.

 

강력해진 위상을 표현한 것으로 영국 지도를 밟고 서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여왕의 모습

 

 

엘리자베스의 죽음

엘리자베스 1세는 우울증과 질병에 시달리면서 45년간의 영국 통치를 뒤로하고 1603년 3월 24일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그녀를 평생 위협했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를 후계로 지목했다. 이로써 튜더 왕조를 끝이나고 새로운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선다. 

 

[전북대 사학과 교수 윤영휘 17회/다음 백과]

 

 

 

 

엘리자베스 1세 관련 영화 추천

천일의 스캔들 /Elizabeth: The Golden Age 골든에이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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