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독일의 공중전
됭케르크 작전으로 영국 연합군이 의지를 불태울때 히틀러는 총통 지령 17호를 내려 최단 시간내에 영국의 공군력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1940년 8월부터는 영국과 독일간의 본격적인 공중전이 벌어진다.
1번째 단계는 8월 16일부터 8월 18일 영국 남동부 해안 공중전이었고, 영국군 95대, 독일군 236 대의 항공기가 타격을 입었다. 2번째 단계는 8월 24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벌어졌는데 이때 독일 공군은 영국 근교의. 공군기지와 비행장을 주요 타깃으로 하고 이때 피해가 커서 영국 공군 전투기 약 290대를 잃게 된다. 당시 영국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기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수도 공격
그런데 독일 공군의 공격목표가 바뀌게 된다. 독일의 공격목표는 영국의 수도 런던이었다. 사실 그동안은. 독일도, 프랑스도 서로의 수도는 공격하지 않았었다. 괜히 상대편을 자극해 자국의 수도도 공격받을 위험 때문이었다.
그런데 1940년 8월 24일 토요일밤 독일 폭격기 한대가 길을 잃고 실수로 런던 상공에 폭탄을 떨어뜨리게 되고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처칠은 폐허가 된 런던을 직접 둘러보며 전쟁의 양상을 바꿀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처칠은 바로 다음날 베를린 공격을 명령한다. 베를린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영국대공습 (영국 본토 항공전)
이에 히틀러는 독일의 런던을 타깃으로 당장 공격하겠다고 경고하고 약 두달간에 걸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런던에 폭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공습경보가 울리자 시민들은 급하게 대피하고 런던 한폭판에 무자비하게 독일의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런던은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영국 시민들은 목숨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때가 영국 본토 항공전 중 가장 치열하고 어두웠던 전투이다.
히틀러의 계획은 프랑스와 영국은 34km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해협을 건너기 위해 먼저 제공권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9월이 되자 가을 강풍이 불기 시작했고 공중전이 어려워지는 겨울이 되기 전에 런던 공습을 통해 승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폭격을 대비해 지하철에서 생활했던 런던 시민들은 최대한 일상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지하철역에서 잠자면서 출퇴근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겁에 질리고 걱정만 하게 되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폭격을 받아 잿더미로 변한 상황이지만 영국 왕실과 총리도 일상을 유지하도록 시민들을 격려했다.
처칠은 라디오 연결로 매일매일 항전 의식을 고취했다. 심지어 잿더미 속의 도시에서 우유 배달까지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겠다는 시민들의 의지였다. 패닉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버틴 영국국민들이었다. 이때 나와던 포스터가 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 각종 패러디로도 이용되었던 유명한 문구이다.
이런 포격 속에서 영국시민들은 버텨냈고 영국 본토 항공전은 1940년 10월 31일에 막을 내린다. 이 전투에 승리요인은 영국 전투기로 처칠은 총리가 되자마자 전투기와 폭격기 생산을 독려했다.
영국 사람들이 애정하는 전투기 2종
스핏파이어가 허리케인에 비해 성능이 뛰어났지만 가격이 비쌌다. 허리케인은 성능은 부족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튼튼했다. 허리케인은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독일 폭격기를 요격했고 스핏파이어는 호위전투기를 담당했다. 이에 맞서 싸운 독인 전투기가 있었다.
독일 주력 전투기이자 최고 수준의 성능을 지닌 메서슈미트 Bf109 가 있었다. 저고도에서 스핏파이어보다 속도가 빨랐던 메서슈미트였고 공중에서 영국 전투기보다 빨리 돌았고 회전 반경도 더 적었다. 그래서 도그파이트시 (상대 전투기의 뒤를 물고 늘어지며 기관총을 난사하는 전투법) 스핏파이어가 우세했다.
지리적 여건상 해협을 건너야 했던 독일 전투기는 연료가 부족해서 싸울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었다. 영국은 이를 적극 활용하여 전투했다.
그리고 영국은 레이더를 개발해 항공기의 접근을 사전에 경고해주는 체인 홈 시스템을 개발했었고 레이더 탑의 탐지 범위는 약 160KM 정도였고 적의 항공기를 신속하게 탐지 후 보고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영국, 독일 모두 이미 전쟁전에 레이더를 개발한 상태였으나 독일은 레이더의 기능을 과소평가하고 전투기 생산에 투자를 했고 영국은 레이더 설비에 집중을 했던 것이다.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한 채 소련을 침공하게 되고 소련 역시 끝까지 저항하며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처칠의 끝임없는 미국 지원요청
처칠은 이 전쟁에서 독일을 이기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동맹이 절실하고 생각했다. 처칠은 미국에 지원요청을 적극적으로 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미국은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미국 의회는 무기 수출법을 통과시키는데 대금 선불과 구입자 운송을 원칙으로 전쟁 물자를 수출하는 법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것을 내세워 처칠의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처칠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11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고 백악관에 기회가 닿는데로 전화를 했다. 루스벨트도 780여 통의 답장을 보낼만큼 힘들었다. 이런 처칠의 끈질긴 요구로 루즈벨트는 미국 의회를 설득해 무기 대여법(미래 상환을 조건으로 무기와 전략 물자를 제공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이 법안으로 영국은 약 310억 달러의 무기를 공급 받게 된다.
그리고 1941년 8월 처칠과 루스벨트 대통령은 영국 군함에서 만나 양국의 공동목표와 전후 질서에 대해 합의를 이루게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미국의 합류로 2차 세계대전의 분위기가 바뀌게 되고 1944년 6월 27일 2차 세계대전의 클라이맥스라고 할수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진행된다. 서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군이 주력이 된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작전을 진쟁한다. 6월 6일 하루에만 약 16만 명의 병력이 상륙하게 되고 1200여 대의 항공기와 5000여척의 선박이 동원되었고 8월 말까지 약 30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다.
노르망디 작전으로 8월 25일 연합군은 파리를 탈환했고 본격적으로 독일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1945년 4월 소련의 독일 베를린 입성으로 유럽 전역을 침략했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패망했다. 전쟁의 승리를 목표로 최선의 노력을 다한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자 지도자가 되었다.
영국 총리 교체
그러나 전쟁 이후 총선에서 뜻밖에 참패를 당한다. 많은 여론이 처칠을 지지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영국총리는 교체 되었다. 1945년 총선 패배로 많은 사람들이 처칠의 정계 복귀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처칠의 나이가 이미 71세였다.
그러나 처칠은 부활했다. 77세 총선 승리를 통해 총리자리에 다시 복귀한다. 그리고 총리가 된지 2년 후 1953년 79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처칠의 죽음과 유언
이후 1955년 처칠은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을 사임하고 1965년 1월 24일 91세의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처칠의 장례식은 세인트 폴 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러졌고 2022년 9월 8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한 엘리자베스 2세 역시 국왕은 신하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처칠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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