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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에바 페론 재단 진실과 에비타의 죽음 ( 111-2)

by 365 ^^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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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최연소 영부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에비타가 영부인이 됐을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황 1946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것이 페허가 된 상황이었다.  이것은 소고기와 밀의 주요 수출 국가인 아르헨티나에게 좋은 고객이 되었다. 이때가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팜파스 대초원 / 소고기 최대 수출국이 된 이유는?

아르헨티나 팜파스 팜파스 지역은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땅이다. 하천이 운반한 비옥한 토양으로 덮여 있어 농업과 목축업 유리한 환경으로 아르헨티나 영토의 3분의 1을

jangane.tistory.com

 

에비타는 페론의 강력한 지지층이던  가난한 노동자인 데스카미사도들(스페인어: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 페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자주 만나 페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며 정책과 생각을 전파하는데 힘썼다. 

 

데스카미사도 뜻

산타 에비타 

에비타는 노동복지부 사무실에 매일 출근을 해 자신을 찾아오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들 데려오면 즉시 병원에서 치료받게 했고 집이 없다면 살 만한 집을 제공하는 등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호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비타의 이런 우호적인 태도에 크게 감동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성녀 (산타 에비타)'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에비타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명성과 소식을 들은 스페인에서 에비타를 초청하게 된다. 이때 에비타는 구호물품을 가지고 가서 나눠줬고 이후 이탈리아를 방문해서도 구호 활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등 여러나라를 방문하며 이 순방은 무지개 여행이라고 불리며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남아메리카의 영부인이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사례이자 유일한 사례이다.

 

 

에바 페론 재단 활동들 

이후에 에비타는 현재 환율 3900 만원을 들여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었다. 에비타는 이 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여러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재단으로 에바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사연이 담긴 편지 한 통을 쓰면 에비타를 만날 수 있었다. 하루에 1만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고 편지를 받은 에비타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1951년 상반기에 2만 5천여 채의 집을 짓고 이들에게 밀가루와 식용유 등 음식부터 약이나 구두 같은 생필품까지 나눠줬다. 

 

에바 페론 재단은 직접적인 구호 활동과 함께 학교, 양로원과 같은 공공시설 건립했고 간호사  학교를 세워 매년 1300명의 간호사를 양성해서 농촌과 빈민가에 이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또한 어린이들의 사회성을 위해 어린이 테마파크를 지어주었다. 

 

이 곳에서 돌봄과 교육 서비스도 진행을 했고 맛있는 음식도 제공 아이들을 위한 건강 검진도 함께 제공했다. 이곳은 고아들이나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동산이었다.  이후에 워터파크도 개장을 했다. 어린이라면 무료로 모든 시설을 이용할수 있었다. 

 

 이 테마파크는 미국을 포함해서 아메리카에서 열린 최초의 테마파크로 월트 디즈니가 에비타가 만든 이 테마파크를 보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최초의 디즈니랜드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에비타 재단 자금 출처의 진실

에비타 재단은 최초 500파운드로 시작해 3년 후 5000만 파운드 수준으로 성장하게 된다.  정부, 노동조합, 기업은 물론 서민들까지도 기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것은 아니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1년봉급에서 이틀 치 임금은 기부해야 했다. 또한 연간 GDP 의 1%가 투입되었는데 현재 가치로 약 8300억원 정도의 자금이었다. 

 

이에 페론의 반대파들은 재단의 규모가 너무 크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일부 사람들은 자금의 출처로 나치 전범들을 지목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에 숨어든 일부 나치전범들로 부터 후안 페론이 보호비를 받은 후 숨겨주거나 망명을 묵인했다는 의혹도 존재했다. 

 

재단 자금의 규모와 흐름이 불투명했다. 자금이 어디서 와서 어디에 쓰였는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에비타는 당시 고급 의상실에 자주 방문을 했고 드레스와 보석을 수집했던 것이다. 이런 치장을 위해 재단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자신들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우상화 작업을 했다. 긍정적인 여론 확산을 위한 노력으로 어린이들이 읽는 책의 내용에 우상화 작업을 시작한다. 어린이 책에 에바 페론의 재단뿐 아니라 후한 페론에 대한 찬양글도 있었다. 

 

에바페론 재단 우상화 내용
후한 페론 우상화 내용

 

이뿐만 아니라 홍보 영상을 제작했고 초등학교에서 문학작품이 아닌 에비타의 자서전을 읽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또한 <데모크라시아> 신문사를 인수해 항상 에비타와 페론을 찬양하는 기사를 싣도록 했다. 또한 에비타와 페론을 찬양하는 사람들. 예술가, 판사, 기사들에게 세금이 면제된 독일 고급 차량을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에비타와 페론을 반대하는 반대파를 탄압했는데 여러 이유를 들어 벌금을 부과, 페업을 하도록 조취를 했다. 페론을 반대하는 대학교수, 대학생들이 생겨나자 2천여 명의 교수를 해고하기도 했다. 이런 방법들로 언론을 좌지우지하며 여론을 이끌어 갈 수 있게 되었다. 

 

1951년 전까지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이에 에비타는 여성정당을 만들고 참정권을 부여했다.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약 380만 명의 여성이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때 대부분의 여성들 64%는 페론을 지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페론과 에비타의 인기는 노동자를 넘어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확대되었고 에비타는 가난한 자들의 성녀이자 여성 참정권을 이끈 영웅이 되었다. 

 

에비타의 죽음 

이후 에비타는 1951년 자궁암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나 그해 말 페론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아픈 에비타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거 유세를 다니다가 투표를 할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쇠약해진 에비타가 병실에서 투표하는 모습

후한 페론은 첫 번째 선거보다 더 많은 지지표를 얻고 대통령 연임에 성공한다. 그러나 취임식때 에비타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고 이런 에비타를 페론이 받쳐서 지탱할 정도였다. 안타갑께도 이 행사가 에비타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된다. 

 

페론 재선 대통령 취임식날

취임식 7주 뒤  1952년 7월 26일 33살의 나이로 에비타는 사망한다. 에비타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비탄에 잠겼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한달간 치러졌다. 애도 행렬은 3 km에 달했다. 열흘 동안 공식 업무가 중단이 되었고 모든 가게가 일시에 문을 닫았다. 

 

21세기에도 페론주의자와 반 페론주의의 갈등은 심한 정치적 대립을 보이고 있고 갈등 속에서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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