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한반도 6회]
오늘의 탐사지: 철원
주제: 광복 후에 왜 분단이 되었을까?
- 카이로 회담 1943년 11월 22일~26일 (미국, 영국, 중국: 최초 한국 독립 선언)
- 알타 회담 1945년 2월 4일 ~ 2월 11일 (미국, 영국, 소련)
- 포츠담 회담 1945년 7월 17일~ 8월 2일 (미국, 영국, 소련) * 일본이 연합국의 항복조건 받아들임.
광복 후 한국은 왜 분단이 되었을까? (38도선이 생긴 이유)
1945년 2월에 얄타회담이 있었다.
얄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후반에 미국,소련,영국의 수장이 소련의 흑해지역 얄타에 모여 독일의 패전과 사후 관리에 대한 논의를 위해 모인 회담이다. (1945. 2. 4~11).
당시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홀로 치르고 있었으므로 소련이 도와주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을 하면 참전의 대가로 제시한 것이 러.일 전쟁(1904~1905) 때 빼앗긴 쿠릴 열도와 사할린 남부 등의 반환을 약속했다.
그러나 소련이 늦장을 부리다가 결국 1945년 8월 9일인 광복 일주일 전에 뒤늦게 참전하게 된다. 그 후 8월 15일(일주일 뒤) 일본의 항복 선언이 있었고 이후 소련군은 급하게 본격적으로 북한으로 내려온다.
갑작스런 소련의 남하에 미국도 급하게 들어오게 된다. 그 후에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나눠서 주둔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독립 국가 아닌 일본 식민지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주권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고 광복 후 임시정부는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하게 된다.
김구 선생이 웨더마이어 중장 미군 사령관에게 쓴 편지에는 공식적인 지위 없이 철저히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겠다.
일종의 임시정부 대표로서는 굴욕적이었던 서약같은 것을 하고 들어와야 했다.
6.25 전쟁 발발 원인과
소련의 참여 과정
1992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스탈린-김일성의 비밀문서를 공개한다.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주장한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서 남침을 하겠으니 군사적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일성의 제안을 소련은 처음에는 거절한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미국이 버티고 있어서 전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중국 내전인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소련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이유
그러나 1949년에 국제 정세에 여러가지 변화가 생기게 된다.
첫째로 중국내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 중국 내전이 종료된다.
둘째 1949년 6월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
셋째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미국의 예상보다 빨리 소련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소련은 자신감이 붙게 된다.
④ 애치슨 라인 발표
결정적으로 1950년 1월 12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애치슨이 미국의 방어선에 대한 설명인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 발표 내용은 아시아 지역은 일본까지만 방어하고 한반도는 누락된 것이다.
애치슨 라인에 왜 한반도가 누락되었을까?
그 당시 한국은 강대국들의 안중에도 없던 나라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가 아니였기에 미국의 방어선에서 쉽게 제외가 되었고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를 하였으며 이는 북한이 6.25전쟁의 빌미를 주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김일성은 다시 스탈린에게 가서 미국은 한반도를 신경쓰지 않으니 남침을 해도 괜찮다는 주장을 스탈린에게 다시하게 된다.
이에 스탈린이 보기에도 1년 전과는 달라진 국제 정세에 중국이 참전을 하면 소련도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이번에는 중국을 찾아간다.
중국은 미국이 참전을 하면 중국이 도와주겠다는 조건부 약속은 받아냈고 김일성은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한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달 만에 북한군에 의해 한반도의 90%을 빼았기면서 임시 수도는 부산이 되었다.
점점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유엔군이 투입되며 총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었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며 맥아더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며 적의 배후를 노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하게 되면서 전세를 역전시킨다.
보급로가 끊긴 북한군은 우왕좌왕하는 사이 1950년 9.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군하여 압록강, 두만강 앞까지 진출한다.
이를 지켜보던 중국이 미군이 개입하면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있었지만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도 위험한 상황이라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20만 명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전세가 역전된다.
후퇴를 하게 된 유엔군(미군 제10군단)과 국군은 흥남에 고립되게 된다. 이에 배로 흥남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흥남 철수 작전을 벌인다. 무기와 군수물자를 싣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왔다.
약 10만 명의 피란민이였고 모두 배에 탈수가 없었다.
영화 <국제시장> 첫 장면의 내용인 무기를 버리고 피란민을 태우게 된다.
병력 약 10만 + 피란민 약 10만 =20만 명이 남쪽으로 피란에 성공한다.
피란길 사망자는 없고 오히려 5명이 출생하며 신생아들의 이름은 김치 1,2~5호 로 붙여진다.
1.4 후퇴로 밀려 내려왔다가
다시 심기일전해 올라가서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서 2년여간 교착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로 휴전되어 일단락 되었다.
휴전 협정국에는 한국은 없었고 군사분계선과 DMZ가 확정되면서 무장이 해제된 중립지역을 감시 관리하는 스위스,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야의 감독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6.25전쟁을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이라 부르는 이유
미국에서는 6.25전쟁을 (the forgotten war)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는 '절대악' 과 싸운다는 명분,신념이 있었으나 그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은 누구를 위한 희생이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 미국조차 회의적이었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제 3차 세계대전의 대리전이었다는 시각이 있었고 3년간의 6.25 전쟁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떨어진 폭탄보다 더 많은 폭탄이 한반도에 떨어졌을 만큼 피해가 컸지만 지금은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이나 유엔군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정말 개죽음만 당하는 전쟁으로 명분은 없고 비극만 있었던 전쟁이었기에 그들은 돌아가서 전쟁에 대해 얘기를 안 했다고 한다.
2017년 한미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은 6.25 전쟁 참전 미군들을 위한 위문행사에 참석한다. 흥남철수 작전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피란민 중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계셨고 흥남 철수 작전의 성공으로 그 많은 피란민들을 북한에서 탈출하게 되었으며 잊혀진 전쟁의 참전용사들이 지켜준 덕에 지금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고 그들이 구해준 사람들이 대통령을 낳기까지 했다는 메세지를 전달하며 미군들에게 전쟁 참여의 자존감을 높여주며 참전용사들이 힐링이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선녀들 한반도 6회 계속▼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6.25 전사자 유해발굴 과정 및 지뢰 찾기 작업
☞히로시마 원자폭탄 탄생 투하 배경 및 티니안 섬 속 원폭 적하장(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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