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여 년 전 문명이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국가와 국경을 맞댄 문명의 교차로였다. 고대 페르시아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정복자가 모두 거쳐가는 국가였고 19세기 들어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세 차례나 침공하지만 실패한다. 그 이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파키스탄과 미국은 소련군과 싸우는 반군 무자헤딘을 지원한다. 결국 소련군은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간다.
아프가니스탄 위치
아프가니스탄은 프랑스와 비슷한 크기로 한반도 크기의 약 3배가 된다. 6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내륙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이다. (사통팔달지역)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이란과 중국을 잇는 통로로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했던 아프가니스탄이다.
이 곳은 많은 정복자들이 거쳐 같다. 다리우스1세 기원전 550년경~기원전 486년경,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정성기에 올려놓았고 그리스 일부와 이집트를 차지,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56년경~기원전 323년경 짧은 생애 동안 그리스에서 이집트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 또한 칭기스칸(1162년경~1227년경)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진출하며 전세계를 두려움에 떨게한 정복자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또한 우리나라 고승 혜초 스님이 갔던 곳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와 언어
아프가니스탄 인구는 약 3984만 명 정도된다. 여러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가장 많은 민족으로 50%가 조금 안되는 파슈툰족, 파슈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파슈툰족(탈레반이 속한 그룹),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27%로 타지키스탄 사람들, 그 다음 하자르족(우리와 생김새가 비슷)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쓰이는 공용 언어 2개인데 다리어(페르시아아어를 부르는 명칭) 파슈투어가 있다. 그리고 소수민족의 언어가 각각 존재한다.
**파슈툰족의 관습법(파슈튠왈리)
탈레반이 속한 파슈툰족의 관습법에는 명예를 중시하고 부당한 일에는 반드시 복수하며 손님을 환대하며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보호해주는 관습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역사
(영국 vs 소련)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
19~20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였던 패권 다툼을 벌인다.
영국의 침공 1차 (1839년)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과 우호관계를 맺자 아프가니스탄 바로 밑에 있는 인도를 빼앗길수 있다는 불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19세기 제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영국이 1832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동맹 협상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에 183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수도 카불을 점령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격렬히 저항하고 영국은 만 2년만에 철수한다.
히베르 통로 학살 사건 (1842년 1월)
1842년까지 진행된 이 전쟁에서 잘랄라바드를 점령하지만 반란이 발생해 영국군대를 철수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히베르 통로에서 급습을 당해 군의관 한명을 제외하고 전몰당하면서 커다란 피해를 입는다. (히베르 통로 학살사건)
영국 2차 침공(1878년~1880년)
영국의 제 2차 전쟁은 1차 전쟁 이후 다시 수도 카불을 점령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거센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철군한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1878년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880년 아프가니스탄은 마침내 영국의 보호령으로 들어간다.
듀랜드 라인 (1893년)
2차 전쟁이 끝난 후 1893년 영국령 인도 제국의 외무장관이었던 듀랜드와 아프가니스탄 국왕인 압두르 라만 칸이 설정한 선으로 당시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인도(현재 파키스탄)와 아프가니스탄간의 국경을 긋고 서로 침범을 하지 말자는 조약을 맺는다. 이것이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이 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튠족은 1500만 명 정도만 아프가니스탄에 있고 나머지 4000만 정도가 바로 듀랜드 라인 바로 너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국경지대가 탈레반의 근거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이들이 넘어올 것이 항상 두렵다. 특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므로 현재도 탈레반 병력이 대부분 파키스탄에서 넘어온다.
영국 3차 전쟁->패배
2차 전쟁 이후 약 30년간 친영파 두 명의 왕 압둘 라흐만칸, 하비불라 칸을 거치면서 영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1919년 왕으로 즉위한 아마눌라 칸은 즉위식에서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선언하고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국력을 소진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영국에서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3차에 걸친 전쟁은 영국의 패배로 끝이 난다.
미국vs 소련 (냉전시대)
아프가니스탄 - 소련 전쟁
혼란의 국가->쿠데타-> 친소련 정권 성립 (1979년12월~1989년 2월)
그 후 왕정으로 국가가 이루어지고 근대화를 위해 소련에 도움을 요청하며 자연스럽게 소련(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의 영향권으로 넘어갔다. 소련은 국가 수립 직후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한다. 그러나 1973년 아프가니스탄 쿠데타가 일어났고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은 친소련 공화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1978년 5년만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다.
쿠데타를 일으킨 아민과 타라키는 기존의 아슬람 문화와 다른 토지 국유화, 사유재산 금지, 조혼 금지, 종교 탄압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급진파는 온건파들을 모두를 숙청한다. 이때 이에 불만을 품은 반정부군이 생기게 되고 급진파 사회주의 정부 타라키와 아민도 분열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대통령이 된 타라키를 2인자 아민이 죽이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하피줄라 아민은 타라키보다 더 심하게 무자헤딘을 탄압한다. 불안정한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보고 1979년 12월 친소련 정권을 지키기 위해 소련이 개입한다.
탈레반 형성 과정
1979~1989년까지 10년간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소련 전쟁이었다. 아민의 요청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온 소련은 제일 먼저 아민을 암살한다. 아민이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인물이라 친미국 성향일거라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무자헤딘은 반소련 항쟁을 이어간다.
미국은 반소련 항쟁을 지원한다. 당시 소련에 반대했던 '무자헤딘'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 항쟁을 했다. 소련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지키기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침략했으나 아프가니스탄은 차원이 다른 종교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 나라이다.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주의에 큰 반감을 보인 아프가니스탄 국민을 복속시키겠다고 소련이 10년 동안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냉전 시대이다 보니 당연히 미국에서 반대파를 지원했던 것이다.
탈레반의 뿌리 무자헤딘
지하드(Jihad)는 아랍어로 '성전'을 뜻하는 말로 이슬람교도에 주어진 종교적 의무를 뜻하는데 지하드를 행하는 사람을 '무자헤딘'이라 부른다. 무자헤딘이 반드시 이슬람을 믿는 것은 아니다.
소련은 무자헤딘을 탄압하기 위해 나비지뢰를 살포한다. 겉모습만 보고 나비 지뢰를 가지고 놀다가 죽거나 다치는 아이들이 많았다. 최근까지도 나비 지뢰의 피해가 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후원하고 이런 그를 아랍사람들이 지원하다. 1988년 오사마 빈 라덴은 국제 테러단체 알 카에다를 조직한다. 알 카에다의 이라크 하부조직으로 IS (이슬람 국가) 가 생긴다. 오사마 빈 라덴을 키우고 후원한 것이 미국이고 무자헤딘에게 돈과 무기를 지원 및 CIA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훈련까지 시켰었다.
탈레반 형성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때 소련에 맞서 싸우던 '무자헤딘' 중에 신학교를 다니던(이슬람을 배우는) 학생들이 있었고 이 학생들을 가리켜 '탈레반'이라고 불렀다. '탈레반'의 뜻은 아랍어(파슈툰어)로 '학생들' 이라는 뜻이다. 1994년 모하마드 오마르가 결성한 탈레반이 소련에 맞서 항전을 진행했었고 탈레반의 목적은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의 탈레반 지원
탈레반을 미국과 파키스탄이 지원을 했었다. 미국의 무기를 가지고 파키스탄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소련과 싸운 것이다. 파키스탄은 직접적으로 무자헤딘 탈레반을 지원했는데 이유는 같은 파스튠속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탈레반에게 많은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탈레반을 지원하고 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 된다.
탈레반 정권 수립
소련과의 전쟁 이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 직전 친소련 '나지불라' 전 대통령 교수형에 처한다. 처음에 탈레반은 각 마을의 치안 유지 역할을 했었다. 처음에 탈레반은 국민들에게 지지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1996년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처음으로 세워진다. 이후 2001년까지 5년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지만 국민에게 악행을 저지르며 아프가니스탄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탈레반 정책 속 악행들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리겠다는 탈레반은 급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에 빠져 무자비하게 공격, 여성들을 차별, 살인까지 자행한 이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지식인은 모두 해외로 빠져나간 상태고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육 받지못한 이들에게 종교적 이념만이 주입되어 종교 문맹인으로 계속적인 참상이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볼수 있다.
▷우상숭배 금지 교리를 내세우며 세계문화유산 바미안 불교 문화유적지의 마애석불입상을 파괴
▷이슬람 율법을 근거로 영화, 음악 등 문화 생활 금지
▷수도 카불의 유일한 종합운동장 가지 스타디움에서 이슬람 율법을 어긴 자들을 매일 오후 3시30분에 공개 처형
▷금주법 시행, 알라의 하늘을 더럽히는 연날리기 금지
▷동성애는 생매장,
▷특히 여성들을 가혹하게 탄압, 교육, 취업을 못하게 했고 사회활동을 일절 금지,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강제시행
▷ 손가락에 메니키어 바르면 손가락 절단.
▷ 문화재 폭파 유일신이기 때문에 우상숭배 금지 목적을 그랬다고...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
탈레반은 2007년 당시 한국인 선교사 23명을 납치하는 사건으로 탈레반은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무장단체이다. 1달의 협상과정과 5개 조항에 합의하고 이때 2명이 죽고 21명의 인질이 풀려났다. 이사건 이후 한국 기업과 한국군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2001년 미국 부시는 텔레반과의 전쟁 선포한다.
[출처 이슈 픽 59회 뉴스멘터리 51회, SBS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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