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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광복절 의미 (광복 3일 72시간 무슨 일이 있었나?)

by 짱신나^^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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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빛을 다시 찾다. 빛을 되찾은 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날로 일본은 항복 방송을 한다.

 

광복 3일 72시간의 기록

 

8월 15일 오전

 

일본의 패전 항복 방송

경성 곳곳에 붙기 시작한 의문의 벽보에 방송을 들을 것을 알렸다. 그리고 8월 15일 정오에 일왕의 패전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방송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패전 방송이기는 하지만 패전과 항복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연합국의 잔악한 폭탄에 의해서 일본이 굉장히 큰 피해를 입었다” 고 하며 “ 그래서 우리는 연합국의 조처에 응한다” 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항복 선언방송을 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패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일본이다.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은 패전했음을 알아채고 이것이 항복 방송임을 눈치챈 후 조선총독부의 지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3.1운동 당시에도 독립이 된 줄 알고 기쁨에 뛰쳐나왔던 사람들이 많았다.  독립만세는 축하의 말이지 시위에 쓰는 말이 아니였기 때문에 나왔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조선인도 일본인도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8월 15일은 생각보다 사뭇 조용했던  풍경이었다.

 

패전 방송 이후 조선총독부에 가장 큰 우려는 폭동이 일어나 일본인의 안전이 위태로운 상황을 우려했다. 이에 조선통독부의 2인자였던 엔도 총독부 정무총감과 조선인에게 가장 인망있던 여운형이 면담을 한다. 방송이 있기 전 오전 7시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했고 정권 이양을 요청하며 정치범, 사상범들을 풀어주는 것을 약속한다.

 

 

 

광복 다음날 

 

1945년 8월 16일 오전 독립 운동가들을 석방하기 위해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 경성 형무소 두 곳을 방문한다.  이렇게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은 수의 복장 그대로 종로까지 행진을 한다. 그렇게 8월 16일 온전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여운형 선생이 “우리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 연설을 했다.

 

수의 복장 그대로 종로까지 행진한 여운형과 독립운동가들
1945년 8월 16일 오전 10시 광복 하루 뒤 여운형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서대문 형무소였다. 서대문형무소를 비롯 여러 경찰서 유치장에서 정치범, 사상범, 경제범 등 수감돼 있던 1만여 명이 석방되었고 휘문중학교에서 이후 연설로 광복의 기쁨을 전달했다. 
 이때 여운형 선생이 '혁명 동지 환영' 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을 환영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분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 여운형 선생의 해방 연설 내용 중 

 

함석헌 선생은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고 언급한 것은 외부적 상황의 의해 부지불식간에 왔지만 오랜 열망의 결과였던 해방의 느낌을 표현한 말이다.

 

함석헌(1901~1989)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던 민권운동가

 

 

광복이 되었음을 알리는 방송 

그리고 8월 16일 경성방송국을 한국인이 접수한다. JOBK->HLKA(kbs의 전신)로 바뀌고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 선생이 연설을 한다. "이제 우리는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의 군대를 가져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나라를 건설 할 것입니다. " 라고 3번에 걸쳐서 대국민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해방의 감동이 퍼져나간다.

 

 

태극기의 모양이 이상하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8월 16일에 광복의 소식을 듣고 다른 지역에 사람들은 소문과 라디오를 듣고 이제까지 우리가 가슴에 형상화 되어있던 태극기를 그려 들고 나온다.

 

 

이 태극기를 그린 사람은 태극기를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1일 태극기가 한번 나붓기고 이후에 27년 동안 사라졌던 태극기를 잠시 보았던 사람들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태극기를 꺼내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완의 태극기로 품에서 꺼낸 태극기의 모양은 제각각일지라도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는 마음은 모두가 하나였다.

 

 

일본인의 본국 송환 모습들

광복 이후 모든 일본인은 귀환을 원칙으로 했고 한반도에 머물던 약 70만 명의 일본인은 송환명령을 내린 미국 군정이었다. 이때 1000엔 정도와 간단한 짐 꾸러미만 허용되었고 손으로 들고 지고 갈수 있는 것까지만 허용했다. 제일 먼저 송환된 것은 군인이였고 일본인 송환자들에 대한 미군의 소지품 검사를 받은 후 본국에 돌아갈 수 있었던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에 남은 일본일들 why?

군인은 숨길 물건이 없어 송환이 잘 이루어졌지만 부유한 일본인들은 한국에 남아있겠다고 한 것이다. 해방 직후 부유한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고 싶었던 2가지 이유는 조선에서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이 있었고 또 하나는 광복이 되어도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지금 한반도에는 백만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있고 이들을 잘 돌려 보내야 합니다. 왜? 일본에 남아있는 수많은 조국의 동포들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은 비교적 무탈하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아직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의 가치전도 현상

이 과정에서 일본의 가치전도현상이 일어난다. 조선에서의 편안한 삶에서 일본에서의 고단한 삶으로 돌아가게 된 이들은 자신들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은 '우리가 모두 피해자다' 라는 기적의 논리를 내놓는다.

 

전범국임에도 미국의 원자폭탄 투여로 인해 일왕은 “ 폭탄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던 것이 변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바탕이 되는 정서인 것이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왜 과거사를 놓고 길게 많이 얘기하는 이유는  일본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전도된 가치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사죄없는 합의와 왜곡된 역사의식으로 과거를 부정하는 일본의 적반하장 태도를 여전히 보이는 일본에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 명확하게 짚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광복절 의미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한반도에서 태극기는 사라진다. 그러나 1919년 3월 백성들의 열망으로 태극기를 되살렸고 1945년 8월 15일 27년 뒤 다시 거리를 가든 채운 태극기가 되살아났다.

 

 

태극기가 사라질때 중심은 황제였으나 사라졌던 태극기를 되찾은 것은 우리같은 보통의 국민이었던 것이다. 이제 광복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국민이 만들어가야 하는 나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제국에서 민국으로  변화되는 하나의 결절점이었던 광복이다. 우리가 역사를 살피는 이유는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 적어도 일제강점기처럼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광복절이 갖는 의미인 것이다.

 

[이슈 픽 e.52 강의자 -역사작가 박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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